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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 : 오월의 그날을 기억하며 조회수 : 3371
글쓴이 : 알지랑 날짜 : 2012-05-14 10:17:00 추천 : 0 반대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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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그날을 기억하며




찬란한 계절의 여왕 오월, 열두 달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월이 오면 언제나 마음이 들떠 있다. 나의 일년 중 시작은 항상 오월부터였으니까. 겨울을 싫어해서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오월은 회생의 달이며 희망의 달이다. 그런 오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슴 아프고 힘든 달일 테지.
언젠가 읽은 SF 소설이 생각난다.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 천국도 지옥도 아닌 그곳엔 누군가 '죽은 나'를 기억해주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누군가가 '죽은 나'를 기억하면 나는 그곳에서 마치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처럼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처음엔 많은 사람들이 '죽은 나'를 기억해준다. 그래서 그곳에서의 삶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바쁘다. 하지만 그 어떤 사건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 다들 잊게 마련이다. 사느라 바빠서, 또 다른 사건들로. 그렇게 조금조금씩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된다. 그러면 그곳에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던 '죽은 나'도 서서히 사라진다. 마치 뚜렷했던 물체가 점점 투명해져 모습이 옅어지는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죽은 나'는 이제,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스토리의 상상력에 너무 황당했다. SF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한데 이상했다.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잊는다는 것,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고 잊히는 존재가 되기 마련이지만, 절대로 잊지 않을게, 하면서도 나 역시 모르는 사이에 잊으면서 살아가지만.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 기억해주는 그 사람마저 죽어버리면 끝인 그 허무함.

시작부터 괜히 사설이 많아졌는데 그런 기억에 관한 거다. 이미 많은 사람이 잊고 있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되새겨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잊지 말아야 할, 그러니까, 오월엔 한번쯤 그날을 생각해보자는. '죽은 그들'이 투명하게 사라지지 않도록.

알고 있는 책들이 많지는 않아 내가 읽은 것들을 위주로 골랐고 덧붙여 같이 읽을 만한 책을 넣었다. 부끄럽게도 그동안 관심이 얕았으므로 깊이는 별로 없다. 그래서 이런 책을 한번쯤은 읽어봐 주세요. 하는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


“군인들은 뛰어내리자마자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먼저 회사원과 중년 남자들이 얻어맞고 나자빠졌다. 중국집 배달부는 배달통과 함께 넘어졌다. 자전거 바퀴가 허공에서 돌고 우동 국물이 쏟아졌으며 뒤이어 머리통이 깨졌고 군화에 짓밟혀 다리가 부러졌다. (…) 언니의 손을 잡고 가던 소녀가 넘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녀를 일으켜 세우는 언니의 어깻죽지를 군인이 곤봉으로 때렸다. 언니는 소녀 위로 넘어졌고 다른 군인이 자매를 밟고 넘어갔다. (…) 한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뒤통수를 쳤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감싼 손에서 붉은 피가 떨어져내렸고, 그 속에 동그란 눈알이 들어 있었다.“


한창훈 작가의 《꽃의 나라》는 '폭력'에 물든 한 소년의 성장기다. 그 소년이 가정과 학교에서 나중엔 사회와 국가에서 당하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다. 그중 가장 '거대'하고 끔찍한 폭력은 바로 '국가의 폭력'이었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그 당시 그 반대편 도시에 살고 있던 어린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몰랐다는 게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늦게 깨달았다. 자칫하면 그조차 모르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심결에 폭력에 관한 단순한 소설일 거라는 기대로 읽다가 나타난 무시무시한 국가의 폭력 장면 앞에서 너무 놀라고 말았다.
책은 그런 것 같다. 어느 순간에 가슴을 후벼 파며 들어오는 책이 있다. 다른 때 읽었으면 아무것도 아닌 채 지나가버릴 그런 글들이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을 뒤흔드는. 그래서 작가의 도리란, 되풀이되고 똑같은 내용에 뻔한 스토리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자꾸 끄집어내고 드러내야 한다는 것. 겨우 한 사람만이 공감하고 충격을 받을지언정.
그가 아니었으면 난 올해의 오월도 그렇게 개인적으로 찬란을 운운하며 보내고 있을지 모르니까.


'자기가 죽인 자의 자식… 용서를 빈다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
"자네에게도 해줄 말이 있네. 26년 전 자네가 쐈던 아기를 안고 있던 여자, 기억하나? 잊을 수가 없겠지. 저기 주차타워에 있는 저격수, 그때 자네가 죽인 그 여자의 아이라네. 그 여자 아이가 커서 지금 저곳에 있다네."
'…… 내가 죽인 자의 자식! 그, 그 아이가!'
"그리고 난 내가 죽인 자의 자식에게 용서를 받았다네. 내가 먼저 용서를 빌었기 때문이지. 자네와 나의 길은 26년 전 그날 이후로 나뉘어졌네. 나는 용서를 빌기 위해 노력했고, 자네는 용서받을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살았어… 자네도 용서를 빌게. 그것이… 옳아. 저기…주차타워에 올라가 있는 저 아이는 평생을… 복수만을 생각하고 살았더군. 자네는 저 아이에게 평생의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사람이야. 용서를 빌게. 자네가 방법을 찾아서."
(…)
"그날로 부터 그래서 내 나이 26살이오. 이전을 잊고 새로 시작하려고 해도 계속 과거는 따라오고 말았소. 당신은 분명히 기억해야 하오. 당신의 욕심이 어떤 아픔과 슬픔을 남겼는지 그때가 당신이 살거나 죽게 되는 날일 것이오."


강풀의 만화 <26년>은 시각적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가슴이 아팠다.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먹먹해지는 마음으로 인해 읽기가 주저댈 정도였다. 강풀은 이 만화에서 '단죄와 복수, 이해와 용서'에 관해 들려준다. 단순히 역사적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상처를 통해 용서와 이해를 보여주는 거다.
가해자와 피해자. 어쩔 수 없이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그럼에도 가해자가 되어 살아가는 또 다른 피해자와 그날의 상황을 합리화하고 용서를 빌 줄 모르는 가해자들. 그때의 상처를 안고 26년이란 세월을 오로지 복수와 단죄를 위해 살아온 사람들을 통해 역사의 비극과 용서란 무엇인가를 감동적으로 풀어냈다.
이 만화를 아직도 '용서'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분이 꼭 읽어보길 바라는 마음 간절.


그가 말했지. 그는 그날 걸어가면서 자기가 외운 것들을 내게 들려줬어. 그건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어. 고통과 피와 눈물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지금도 종로 거리를 걷다보면 그때의 우울과 멜랑콜리가, 그다음에는 열에 들떠 자기가 들은 이야기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내게 들려주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라. 뜨거운 여름이었지. 나도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들었어. 그때 나는 뜨거운 여름 안에 있었지. 그때 나의 영원을 생각하고 있었어. 하늘이나 바다 같은 것, 혹은 시간이나 공간, 우주 같은 것, 어쩌면 사랑 같은 것.

김연수 작가의 <원더보이>는 1984년에서 1987년까지의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과거는 1970년대로 넘어가 1980년을 거쳐 온다. 그 시기, 박정희군부독재정권에서 벌어진 많은 사건들로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아직도 잘못을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을 하던 그때까지.
김연수 작가는 이 책 이전에도 그날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줬다. 왜 그렇게 작품마다 내비치는가, 궁금했는데 <원더보이> 낭독회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11살 때, 박대통령이 서거한 후 아버지의 권유로 신문 스크랩을 했단다. 중요한 사건이므로 자료를 모아두면 나중에 쓸 일이 생길 거라는. 그 당시 계엄이 확대되고 1월부터는 대학생 시위가 있었는데 그걸 모두 스크랩하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 봄이 왔다. 그 봄의 신문에 '춘래불사춘'이란 글자가 나왔는데 그 말이 유행했단다. 그것은 3김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다음 대통령 자리를 두고 세력 다툼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뉴스가 나오니 스크랩이 재미없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스크랩에 점점 지쳐갈 무렵,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던 어느 날 뉴스에서 광주 MBC가 불타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11살 소년의 눈엔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신문엔 별다른 기사가 없었다. 그러다가 광주에서 계엄군이 물러난 뒤에야 신문에 소식이 나왔다. 그건 광주가 폭도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기사였다. 이후 신문에 실린 유언비어에 관한 기사들. 총 들고 있는 시민군 사진 같은 기사들을 스크랩했다. 며칠 지나 평온을 찾은 광주 기사까지. 그 이후엔 다른 소식들이 올라오지 않았다. 스크랩이 재미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김연수 작가가 광주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그건 아마도 모든 지방에 살았던, 특히나 경상도 지역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대학에 가서 제일 먼저 받는 충격적인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 사실을 알고 문학을 하게 되면 광주에 대한 이야길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그래서 자주 작품에 등장하는 것이란다. 매번 쓸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잊어가고는 있지만 작가가 된 가장 원초적인 사건이기에 모른 척하며 살지는 않을 것 같단다.


이외에도 그날의 봄에 관한 작품들은 그날을 잊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관심은 점점 적어진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고 이젠 잊고 살자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진보를 운운하는 당에선 자기들만의 세력을 위해 정신이 없고 대선을 앞두고 다들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쁘다. 어차피 그들은 생색내기일 테니 그렇다면 우리라도 오월엔 한번쯤 그때를 기억해주자. 처음 접했던 그때의 충격을 떠올리고, 관련 책을 읽거나 영화라도 보면서. 그래서 오월만은, 죽은 자의 나라에서 우리의 기억으로 많은 '죽은 자'들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오월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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