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2009-05-18
15,000원 | 428쪽 | 223*142mm
종합평점 : 4.2 ( 8 명)
우리 시대의 ‘대중지성’ 로쟈, 그의 ‘오프라인 서재’에 초대합니다!
경계 없는, 경우 없는, 경이로운 인문 지성, 로쟈의 첫 책
‘로쟈의 저공비행’ 이 경유한 광대한 책읽기와 삐딱한 글쓰기의 놀라운 궤적!

“뜻하지 않게 ‘대표적인 인터넷 서평꾼’에다가 ‘인문학 블로거’ 행세를 하게 된 건 내가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내놓고 활동하는 이들이 적어서다. 나는 하녀고 광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다만 읽고 쓰고 떠들겠다. 뭔가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 지금보다는 조금 나은 세상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견딜 만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당분간은 좀더 읽고 쓰고 떠들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당신에게 끼니가 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대단찮은 것이어도 ‘겸손한 식사’ 정도는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책머리에」 에서

■ 괴물 혹은 유령, 책 읽는 사람 로쟈는 누구인가

인터넷을 할 줄 알고 책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로쟈’라는 이름은 전설이자 유령입니다. ‘로쟈에게 물어보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 년 동안 인문학 리터러시의 준거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 멘토 역할을 해온 저 유명한 서재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의 주인장 이현우가 신비의 휘장을 걷고 첫 책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드디어 오프라인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공식적인 이현우(로쟈)의 소개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현우: ‘로쟈’라는 ID 혹은 필명으로 알려진 그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2004)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강사이며,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겨레21》과 《교수신문》 등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다. 인터넷서점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꾸리고 있으며, 이른바 ‘인터넷 서평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부제에서 지칭한대로 로쟈는 스스로 ‘곁다리 인문학자’라 말합니다. 이 겸양의 정체성을 로쟈는 다음과 같이 부연합니다. “내가 전공하지 않은 분야들까지도 건드리다 보니 부득불 딜레탕트에다가 곁다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걸 좋게 보아 ‘대중지성’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사실 전공 분야라는 건 형식적이거나 편의적인 칸막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제도적 관성에 의지하고 있기에 현실적으로는 무시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알아야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곁다리 인문학자다”라고. 처음 로쟈가 생각한 레테르는 ‘삐딱한 인문주의자’입니다. 정색하고 정통 인문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읽고 말하는 고식적인 태도가 아닌 ‘제멋대로 읽고 기우뚱하게 쓰는’ 경쾌하고 치우친 시선을 지칭하고자 했으나 더 삐딱해지고자(?) 다음 권의 부제로 남겨두었습니다.

■ 인문학 살롱, 로쟈의 서재를 훔쳐라!

하루에 무려 1000명 정도가 꾸준히 접속하여 인문학 관련 신간 소식과 지적 흐름을 엿듣는 저 광대한 <로쟈의 저공비행http://blog.aladdin.co.kr/mramor>을 슬쩍 보기만 해도 ‘괴물’이라는 경탄이 터집니다. 이 종횡무진의 책읽기와 엄청난 사명감은 도대체 어떤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로쟈라는 희유한 지성이 갖는 의미는 무얼까? 로쟈 현상 혹은 로쟈 스타일을 이해하는 몇 개의 키워드를 적어봅니다.

1. 로쟈에게는 얼마만큼의 책이 필요한가 -경이로운 지식 계통수(系統樹)
로쟈는 책이 전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책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씌어 있는 역설을 읽어냅니다. 인문학의 온갖 지식이 뒤섞인 만다라와도 같은 로쟈의 서재. 오늘도 굵다란 줄기를 더듬으며 자유자재로 섭렵하는 레퍼런스 가지들로 지식 계통수가 커갑니다. 천 갈래의 지식이 교차하는 인문학 터미널, 로쟈의 서재는 우리 시대의 지식 방주입니다.

2. 환대의 글쓰기 -웰컴 투 로쟈 라이브러리!
누구에게나 좋은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로쟈 씨. 로쟈의 ‘빠른 뇌와 성실한 손’이 관리하는 서재는 오늘도 읽을 만한 책과 알아볼 만한 지식을 전하느라 24시간 열려 있습니다. 로쟈가 네티즌들을 위해 베푼 ‘환대’는 늘 충만합니다. 이는 인문학의 확산 혹은 풍부한 독서 문화를 희망하는 로쟈의 윤리적 태도입니다.

3. 인문학 리터러시의 심화 학습 -‘자기를 포함한 인문학’을 찾아서
박식함을 자랑하는 인문학자 로쟈. 그는 만화와 리빙, 자기개발서 분야의 도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식 분야를 넘나들고 통합하는 지성입니다. 위기를 넘어 ‘보호구역’이 되어버린 21세기 ‘인문학의 구조 변동’의 체현자인 듯한 로쟈는 현대 인문학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 경계와 폭은 어디까지인지를 묻는, 인문학 리터러시의 확장전에서 싸우는 야전병 같습니다. 그는 자신을 내던지지 않는(포함하지 않는) 인문학을 불신합니다. 그래서 발문을 쓴 천정환 교수(성균관대 국어국문학)는 “로쟈와 그의 블로그 ‘친구’들에게 인문학의 미래를 문의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4. 지젝과 로쟈 -지절이는 지젝과 로쟈의 수다
현대 철학계의 이단아 지젝. 로쟈는 지젝의 수다한 철학에 매료되고 그에 대한 오해를 푸는데 오래전부터 진력해 왔습니다. 로쟈와 지젝 사이, 그리고 한국 독자들의 지젝 이해를 위한 로쟈의 역할에는 어떤 상사성이 있지 않을까요? 참고로 로쟈가 지절거린 덕분에 지젝은 이제 한국 지식장에서 현대 철학 혹은 ‘통합 지성’의 일반명사가 되었습니다.

5. 로쟈와 번역 -울부짖는 번역 비평
로쟈는 용감합니다. 아니 어쩌면 무모한지도 모릅니다. 자칫 원한을 부를 수도 있는(실제로 원한을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번역 비평에 과감하게 실명을 거론하며 번역 교정을 선보입니다. 그의 고군분투의 활약을 통해 번역의 위엄과 책 만드는 일의 윤리에 대한 공론장이 조금씩 넓혀지길 기대합니다.

6. 책읽기의 쾌락과 글쓰기의 향락 -로쟈의 문채 혹은 문체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며 즐거운 저항이니, 악착같이 즐겁게 책을 읽으라고 말하는 로쟈의 문체는 우선 친절하고(밑줄과 부연) 유쾌합니다. 밝은 광기에 가까운 활달함이 가득한 로쟈의 글쓰기는 분석과 종합보다는 자유자재의 해독과 독해라 할 만합니다. 철학적 로고스보다는 시적/소설적 로고스의 마임극을 사랑한다는 로쟈의 ‘종횡사해’ 하는 문채는 인터넷 글쓰기를 만나 더욱 사적이면서도 경쾌한 톤을 연출합니다.
7. 불면의, 강력한 사명감 -나서는 자의 슬픔
로쟈는 ‘고투(苦鬪, 孤鬪)’를 자처하며 읽고 쓰는 사람입니다. 강의와 집필, 독서와 번역 그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서재에 새 글을 올리고 문답을 답니다. 이 불타는 사명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대표적인 ‘대중지성’이자, 새로운 면모를 지닌 지식-미디어-활동가로 괴력의 로쟈를 꼽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로쟈의 친구들이 늘어나 인문학 문림(文林)이 무성해진다면….

8. 비전형적 인문학자? -욕심내보라, 로쟈 따라잡기
그렇다고 로쟈를 이 시대 지성의 전형으로 꼽기에는 어색합니다. ‘경계 없는 지식의 향유자’이자 ‘온갖 학문을 섭렵한 인문학자’로 앞서 경우 없던 지성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로쟈. 그는 대중과 남다르게 접속하는, 오늘의 앎-제도를 비껴서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발문을 인용하자면 “로쟈는 한국 지(知)가 거쳐온 장소들과 오늘에 다다른 곳을 보여준다. 1980년대로부터 2000년대에까지 이어진 종합적 인문성의 ‘내면 풍경’. 로쟈를 낳은 것은 ‘80년대’였지만 그는 다른 가지에 꽂혔고, 2000년대에 살고 있지만 다른 ‘누빔점’이다. 요컨대 그는 전형은 아니다”라는 겁니다.

■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어떻게 짜여졌는가

이 책에 수록한 글들은 로쟈가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쓴 글 가운데 고갱이(?)를 고른 것입니다. 주로 인터넷에 자유롭게 쓴 글들이어서 대부분 발랄한데, 이번에 책으로 엮으면서 그런 경쾌함을 적절하게 손보느라 로쟈와 산책자는 애를 먹었습니다. 로쟈는 이 책을 일종의 블룩blook(blog+book)이라 칭합니다. 블로그에 올려둔 글들 가운데 골라내서 편집해 만든 책.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로쟈의 저공비행〉에 공개되어 있으나, 그렇지 않은 글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으로 엮으면서 대부분의 글을 다시 손봤기에, 온라인 버전과는 제목과 내용이 다소(어떤 경우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책은 그간 로쟈가 쓴 문학과 영화, 예술, 철학에 대한 진지한 에세이와 지젝 읽기, 그리고 번역비평에 관한 주요 글들을 망라해 놓았습니다. 부제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은 이 책에 묶인 글들이 비록 전부는 아니더라도 소위 ‘본격적인’ 인문학과는 좀 거리가 있다는 걸 암시하며, 또 많은 글이 다른 텍스트 읽기에 기대어 생산된 텍스트라는 점을 가리킵니다.
이 글들은 이제 한국 인문학에서는 김현 이후 제대로 만나기 어려웠던 ‘에세이’ 혹은 문예 비평 성격의 것들입니다. 로쟈는 이런 종류의 글을 너무 쉽거나 말랑하게 느끼는 독자들이 앞으로 더 늘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바로 그러한 ‘인문학 독자층’을 넓히는 데 일조하는 것이 로쟈의 깊숙한 욕심입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프롤로그와 에피소드, 그리고 다섯 개의 서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프롤로그「‘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위하여」는 로쟈의 독서론을 밝히는 성격의 글입니다. 백범의 글에서 인용한 글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로쟈는 공부와 학습을 구분하며, 즐거운 지식을 향한 발원을 시작합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즐거움’또한 끝이 없다. 그런 즐거움을 배우고 익히는 것,
즉 다시 가르치고 베푸는 것이 나는 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해서,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언제나‘즐거운 지식’이며, ‘새로운 계몽주의’란‘즐거운 계몽주의’다. 그것이 시민의식의 함양이고
시민 교양의 양생(養生)이다. 시민의 학습이고 합창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대라! -20쪽

‘로쟈의 문학 노트’라고 부제를 붙인 서재1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넓은 의미’의 문학을 다룬 글들을 배열하였습니다. ‘본격적인’ 문학론과는 거리가 살짝 글들입니다. 문학은 모든 것을 다룬다 할 수 있기에 서재1에는 책읽기에 대한 생각과 함께 세상을 보는 시각까지 포함하였는데 이는 로쟈 서재의 대문 역할을 할 것입니다. 최대 조회수를 기록한「문체, 혹은 양파에 대하여」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어지는「누가 희망을 말하는가」와 더불어 로쟈의 문학관(문체론)과 세계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여서는 안 된다
(〈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81쪽

‘로쟈의 예술 리뷰’라고 부제를 붙인 서재2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는 미술 에세이인 「고요한 삶과 최대한의 삶」한 편을 제외하면 주로 영화에 대한, 영화를 빌미로 한 글들을 모아놓았습니다. ‘생명복제 시대’의 예술로서 영화 텍스트 깊이 읽기를 선보이는 이 글 가운데 김기덕의 영화〈사마리아〉와〈빈집〉에 대한 비평은 네티즌들로부터 압권이라는 호평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원조교제라는 한국 사회의 이슈 혹은 치부는〈사마리아〉의 소재일 뿐이고,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바수밀다/사마리아라는 보편적 (여성) 신화, 혹은 판타지다. 가장 단순한 거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진의‘아빠’다… 그렇다면, 그의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그건 근친상간에의 판타지다. 그러니까 그에게 딸 여진은 딸이면서도 동시에 딸 이상의 존재였는바, 아빠의 연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아빠’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쓴 건데, 두 부녀가 사는 집안에 부재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다. 이때 아버지는‘부권적 기능’의 대행자로서의‘아버지의-이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들 부녀는 부재하는 엄마/아내의 역할을 번갈아가면서 한다.
여진에게 아빠는 아빠면서 엄마고, 아빠에게 여진은 딸이면서 아내다. -166쪽

‘로쟈의 철학 페이퍼’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3 <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은 주로 니체와 데리다, 그리고 벤야민 읽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은 다위니즘(Darwinism)적 세계관(먹고, 살고, 낳고!)이 무엇인지를 압축해놓고 있으며,「철학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는 철학에 대한, 그리고 로고스에 대한 로쟈의 기본적인 이해를 가볍게 정리한 글입니다.

벤야민의 무능이란 사랑에도 정치에도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투신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모스크바의 이별 장면에서도 그러한 자신의 무능을 담보로 하여 벤야민이 챙긴 것은 ‘아마도 커다란 여행가방’을 가득 채운 논문 자료들과 쇼핑한 물품들이었을 것이다.
벤야민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는 라치스나 수잔 벅 모스가 답답해하는 만큼 우리도 답답하다.
하지만 벤야민의 비밀은 그 무능(답답함)에 있는 듯하다. 그걸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함’
‘아직 정신 차리지 못함’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정신 좀 차려라, 벤야민!”). -256쪽

‘로쟈의 지젝 읽기’를 부제로 단 서재4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는 로쟈가 지젝을 즐겨 읽는 이유와 함께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 어떤 것인지 살짝이나마 드러내줄 수 있는 글을 몇 편 모아놓았습니다. 로쟈가 장래에 쓰고자 하는 본격적인 지젝론의 일부 밑그림으로 보아도 좋겠습니다.「지젝과 함께 한국 문학을 읽다」는 차라리 문학론에 가깝지만 지젝의 아이디어를 원용하고 있어서 서재4(‘로쟈의 지젝 읽기’)로 분류했습니다.

모호한/난해한 아카데미 담론과 대중문화를 접속시켜줌으로써 지젝은 무슨 일을 하는가?
바로 아카데미 바깥의 대중들이 자신의 생활 주변과 자신이 향유하는 문화 속에서 철학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 그리고 사실 이러한 역할은 백인의 컨트리 뮤직과 흑인의 리듬앤블루스를 결합시킨 록음악의 정신에 얼추 부합하지 않는가? 지젝과 ‘지젝 현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은 어느 영화감독의 말대로, 지젝은 “반지성주의의 시대에 지성주의란 게 얼마나 재미있고 활기차며 뻑적지근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319쪽

‘로쟈의 번역비평’이라고 부제를 붙인 서재5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는 지젝과 더불어 로쟈의 주요 관심 주제인 번역 문제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들을 모아놓았습니다. 때론 서늘하게 때론 신랄하게 번역의 윤리를 개진하는 로쟈의 태도에서 아름다운 책에 대한 숭배와 번역자의 고통과 노고에 대한 동감이 읽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비판하는 것은 그의 무능력이 아니라 고집스런 불성실과 아집, 그리고 부정직이다.
대충 얼버무리고, 황당한 걸 갖다 붙이고, 자신이 이해가 안 돼도 넘어가는 태도 말이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그런 노력하지 않는 태도, 거만하고 방만한 태도다.
독자가 무서운 줄 안다면, 그런 식으로 함부로, 대충 번역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되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366쪽

에필로그에서 로쟈는 ‘눈물겹게도’ 미션 임파서블의 집필 계획을 밝힙니다. 그것은 철학적 로고스와 시적/로고스가 통합된 글쓰기로 이제까지 본적 없는 잉크로 씌어질 것 같습니다. 로쟈의 기원과 사생활에 대해서는 책의 끝에 실린 덧붙여놓은 「로쟈의 독서문답」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언젠가 나 자신이 그런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오랑이 포기한 ‘눈물의 일반이론’이란 것 말이다. 현재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 눈물의 일반이론을 위한 연습이고 밑그림이라는 생각도 한다. 거꾸로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에 근거한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는 철학의 무능력 자체는 바로 우리의 무능력을 닮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진 각자의 운명 속에서, 각자의 눈물 속에서 의미 있는 일반이론, 즉 연대를 끌어내는 일 말이다.
개인의 울음을 집단의 통곡으로 바꿔놓는 일 말이다. 언젠가는. -409쪽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로쟈가 이제까지 호명한 거인의 어깨를 구경하고, 로쟈가 다다른 호기심의 변두리와 아직 가지 않은 길이 어디인지 당당히 ‘감상’하고 밑줄 그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가 자국을 낸 지식의 갱도를 따라 탐사를 하다보면 앎이 응축된 대리석을 발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인문’에 뜻을 가진 독자에게 일독, 아니 다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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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프롤로그: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위하여

서재1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 -로쟈의 문학 노트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
즐거운 도망, 즐거운 저항 : 책읽기에 대하여
아직도 러시아 문학인가 : ‘몰락 이후’의 러시아 문학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필요한가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하여 :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

서재2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로쟈의 예술 리뷰
미용사 판타지에 대하여
생명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 <나쁜 피>의 한 장면에 대한 생각
로망스 대 포르노 :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 두 편
기적이란 무엇인가: 쿠스투리차의 <인생은 기적처럼>에 기대어
아버지의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 김기덕의 <사마리아> 읽기
환대의 윤리학과 유령의 존재론: 김기덕의 <빈집> 읽기
고요한 삶과 최대한의 삶: 황혜선의 정원 이야기

서재3 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 -로쟈의 철학 페이퍼
늙어가는 느릅나무들 : 아줌마 철학 vs. 이데아 철학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 : 니체와 여성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 : 법과 정의 사이
‘벤야민의 이름’을 읽기 위하여
잠자는 숲 속의 벤야민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

서재4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 -로쟈의 지젝 읽기
내가 지젝을 읽는 이유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 : 지젝의 <이라크> 읽기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테러리즘 : ‘베슬란의 비극’에 부쳐
그리스도에서 레닌으로
지젝과 함께 한국 문학을 읽다
레닌주의와 대중 유토피아

서재5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 -로쟈의 번역비평
경연으로서의 번역 : <햄릿>의 경우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유명사의 오역에 대하여
번역 비평은 노예의 도덕인가: 원한에서 양심의 가책까지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 릴케의「두이노의 비가」읽기

에필로그: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
닫으며: 로쟈의 독서문답
발문: 로쟈와의 만남에 대하여 _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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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려우면서도 쉽고 멀면서도 가까운 그의 서재
    agnes | 2009년 0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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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모듬정식? 이것 저것 여러가지에 대한 글이 들어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잡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책은 아니다. 그리고 페이지수가 장난이 아닌데, 그거때문에 겁...

      이 책을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모듬정식? 이것 저것 여러가지에 대한 글이 들어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잡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책은 아니다. 그리고 페이지수가 장난이 아닌데, 그거때문에 겁을 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블로그에 포스팅되어있는 글들을 모아놓은 거라서 한 이야기가 그렇게 길지 않아 잡지 몇장을 읽는 것 처럼 그나마 편안하게 책을 대할 수 있었다. 특히 글쓴이는 철학쪽으로 많이 알고 또 관심이 많아 보였는데 나는 정 반대였기 때문에 이 책을 질리지 않고 읽을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었지만 구성의 특성상 차근차근 읽어나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인가, 철학이라는 분야를 처음 접해본 것 같다. (학교에서 도덕시간에 시험본다고 달달 외웠던건 하나도 기억 안나니까 패스) 소피의 세계. 많은 학생들이 교양서적으로 읽었던 책이다. 소설형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철학을 기피하는 학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이을 거라고 했던가... 하지만 나는 철학에 대한 논의가 담긴 페이지는 쭉 뛰어넘고 소설의 스토리에 해당하는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다! 하하. 나는 그런식으로 이때껏 쭉 철학을 기피해왔었다. 그래서 그런지 글쓴이의 철학에 대한 글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내가 철학에 대해 조금 알고 이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남지만 그 덕에 철학쪽으로 관심을 조금 돌릴 수 있게 해줘서 이 책이 참 고맙다. 이 책을 읽고 시간이 나면 철학에 대해 조금은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가장 맘에 들었던 내용은 바로 번역에 대한 글들이었다. 이건 글쓴이만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이기도 하다. 대학 와서 매 학기 시작마다 교과서를 사려고 할 때 번역본을 살지 원서를 살지 고민한다. 그도 그럴것이 원서는 내용이 충실하지만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번역본은 우리말이긴 하지만 오히려 부정확하고 질이 좋지 않은 번역의 책들이 많아서 살 때 조심해야한다는 리스크가 있기 때문이다. 번역서를 괜히 비싸게 주고 샀다가 알아들을 수 없으면 얼마나 억울할까 그런 생각에 나는 이때껏 울며 겨자먹기로 영어공부한다는 셈 치고 원서를 구입해 왔다. 그때마다 들었던 생각을 글쓴이가 멋지게 글로 표현해줘서 속시원하기도 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에 반갑기도 했다.


      이 책에는 영화에 대한 리뷰도 있었는데, 나는 그 부분들이 무난하게 읽힐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와 철학을 연결지어놓은 글들이 많아서 참 난감했다. 영화야 좋아라 하지만 철학에 대해서는 왕무식아닌가. 휴.. 그래도 차근 차근 읽어가며 글쓴이가 여기서 뭘 말하고싶어하는 것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아, 영화를 보면서 이런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읽은 보람이 있는 부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쉬웠던 점은 중간중간 가아끔 오타가 있었다는것? 번역비평쪽에서 글쓴이가 오타는 번역하는 사람의 무성의의 소실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부분을 읽고 나서 막상 이 책의 오타를 접하니 조금 우스웠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들어간 번역서들의 이상한 내용은 오히려 읽는 사람의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했다. 오히려 글쓴이가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을 단 부분만 적어놓았더라면 더 좋았을 걸 싶다.

  • 나도 이제 저공비행 할란다. 인문학, 철학, 예술, 지젝, 라캉, 러시아
    jjolpcc | 2009년 0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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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해야겠지만 실상은 끝도 없이 침잠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는 것이 맞는 얘기 일 것이다. 계기는 물론 책이다...
      요즘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해야겠지만 실상은 끝도 없이 침잠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는 것이 맞는 얘기 일 것이다. 계기는 물론 책이다. 몇 년 동안 나 잘난 맛에 책을 읽고 나름 평가도 하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라는 오만함에 빠져 있었다는 자각이 시작된 건 한 달 전쯤이다. 김탁환의 『천년습작』에서 글쓰기의 높은 벽을 느꼈다면 이번에는 읽기와 사유하기의 두터운 벽을 절감했다. 흔히 하는 말로 참담함이라는 표현이 적절할까?

    뭐랄까? 이토록 무겁다는 느낌이 들었던 책이 있었을까? 책이 무겁다는 물리적인 얘기가 아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깊고 두텁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책이란 말이다. 문학, 철학, 예술 그리고 번역에 이르기까지 책을 통한 지은이의 방대한 지적 소양은 무겁게만 느껴진다. 단순히 읽기 어렵다거나 난해하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뼈저리게 나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고 또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자괴감을 끊임없이 만드는 책이었다. 정말 무겁고 두터웠다. 어찌할바를 모를 정도로 말이다.


    지젝이 누군지, 라캉과 데리다 그리고 벤야민은 또 뭔가. 새롭게 조명되는 레닌과 쿠스트리차의 영화는 또 무엇인지. 그 외 이름만 들어본 생소한 철학자와 사상가, 작가와 번역가들의 등장. 제목만 가물거리는 영화들과 책들. 무엇보다 이렇듯 생소한 사람들의 지적 결과물들을 영화와 텍스트, 현실정치와 경제, 문화등과 접목시켜 무한하고 거대한 생각의 틀을 확장시켜나가는 글쓴이의 솜씨는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에게는 또 하나의 아주 쓴맛이 나는 좋은 약과 같은 책이었다.

    러시아어 전공의 글쓴이는 번역에도 상당히 깊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언어를 전공한 사람답게 불어나 영어에 대한 번역도 자유로운 편이었고 외국어가 지니는 뉘앙스에 대한 섬세한 접근도 눈에 띄었다. 출판사별 다양한 번역서에 관한 해박한 지식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저 부러웠다. 공학을 전공한 사람인 나에게 분명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외국어공부의 강렬한 욕구를 부추기는 부분이었다. 과연 이 자극에 힘입어 외국어 공부를 시작할지는 의문이지만 나름 나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자각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리라(영어공부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이토록 간절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저자의 독서량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 그 박식함에 배가 아팠다. 그래서 지젝의 책도 사고 장정일의 책도 샀다. 두꺼운 인문서를 받고 보니 각오가 새로워졌다. 이제 좀 독하게 읽고 쓰고 생각하기로 말이다. 그동안 너무 헐렁했다. 나태했고 게을렀다. 내게 남은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더 치열하게 탐구하고 성찰해야한다. 인터넷이나 미디어에서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에 너무 정신을 놓고 살았다. 이젠 정신 차려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러시아 문화의 몰락은 넘쳐나는 정보가 서서히 인간의 정신을 잠식해가고 있는 것과 관계있습니다. 체험이 더 증가하는 게 아니라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의미는 줄어듭니다. 인터넷, 이건 쓰레기통입니다. TV도 쓰레기통이고.......오늘날에는 위대한 시인이 출현한다고 해도 아무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오늘날엔 영화도 끝났고, 예술은 자신의 권위와 대중에 대한 매혹을 잃었습니다. ----본문 63장


    그래서 이젠 나도 책읽기와 사유하기의 저공비행을 시작할란다.


    일반적으로 저공비행은 매우 위험하다. 고공에서는 지상의 대공화기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형을 제대로 정찰하고 정확한 폭격과 타격을 위해선 저공비행이 필수적이다. 인문학자 이현우 아니 로쟈의 위험천만한(?) 저공비행이 계속 되기 바란다. 인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확하고 정밀한 지적 결과물을 위해, 영역없는 자유로운 가로지르기를 통한 세상읽기가 꾸준히 가능하도록 말이다. 아울러 이제 막 시작한 나 자신의 저공비행도 계획대로 진행되길 빈다.

  • 자유롭고 무궁무진한 저공비행이 계속 되길...
    술패랭이 | 2009년 0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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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롭고 무궁무진한 저공비행이 계속 되길...] 네티즌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가? 내가 첫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처음으로 인터넷에 접속한 때를 기억하니 벌써 12년 전이다. 독수리 ...
    [자유롭고 무궁무진한 저공비행이 계속 되길...]



    네티즌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가? 내가 첫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처음으로 인터넷에 접속한 때를 기억하니 벌써 12년 전이다.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면서 오로지 첫아이를 키우는 불안감을 떨치고자 육아정보를 얻는데 여념이 없었던 나. 그렇게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고 조금씩 이곳저곳 방문하면서 나 역시 어느 사이에 네티즌에 합류하게 되었다. 지금의 인터넷은 정보만을 얻으러 다니기에는 너무도 많은 정보가 넘쳐서 이제는 공유 내지는 공감, 의견을 나누는 공간으로까지 발전해 갔다. 오히려 답답한 현실에서의 소통보다 더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나누는 공간이기에 대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몰려드는 것 같다.

    인터넷을 누비는 사람들 가운데 인터넷 공간 속에서 자신의 집을 자신의 색깔로 채우는 사람들도 많이 등장한다. 블로거 활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잡다한 정보 수집부터 책을 읽은 후에 리뷰, 시국에 대한 생각, 문학과 대중문화에 대한 생각 등등...그 가운데 로쟈라는 사람이 있었다. 솔직히 그의 닉니임을 들은 기억은 나지만 남의 집을 그다지 기웃거리지 않는 나로써는 이름만 알고 있는 한반 친구정도였다.

    그래도 이름을 알고 있는 탓인지 <로쟈의 인문학서재>라는 이름의 책이 나왔을 때, 00출판사가 먼저 들어오기보다는 인터넷?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역시 인터넷에서는 그에 대한 정보를 빨리 얻을 수 있었다. 알라딘에서 오랜동안 블로거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인문학은 물론 대중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 대한 글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그의 글을 인터넷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아닌 지면을 통해서도 많이 소개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대하는 나로써는 약간의 모험을 가지고 이 책을 읽은게 사실이다.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인문학.이라는 말은 무척 어렵게 느껴지고 웬지 무겁고 어려운 비평이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런 대부분의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읽기에 대한 두려움을 간파한 것인지 로쟈는 책읽기에 대해서 즐거운 도망, 즐거운 저항이라고 표현했다.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따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고, 저항하지고 못한 것이 된다. 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애초에 그런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아무래도 요지는 마지막에 있는 듯..책 초입부터 책읽기에 대한 로쟈의 생각을 들으면서 제대로 된 책선택을 하고 즐거운 독서를 하는가에 대한 의문부터 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 참 정곡을 제대로 찌르는 구나...쩝소리 나게 입맛을 다시면서 말이다.

    그래서 우선은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선택된 이 책을 무조건 끝까지 악착같이 읽어내자는 결심을 했다. 솔직히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말이 한둘이 아닌데다가 그가 많이 언급하는 제첵에 대해서는 정말 문외한이어서 낯선 곳을 걷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움까지는 아니지만 공감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이 사람 정말 문학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사람이구나...하는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제목 너머에 달라붙어 있는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말이 정말 딱 어울린다. 정통 인문학자라기보다는 곁다리고 더 방대하게 더 자유롭게 관심을 갖고 표현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자유로움과 관심으로 높이 날기보다는 저공비행을 하면서 더 많은 관찰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저공비행 속에 담긴 인간에 대한 사회에 대한 문학에 대한 애정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비록 나같이 알아듣기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독서의 즐거움을 전해줄만하다고 생각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거론해서 그런지 레오까락스의 <나쁜피>의 한장면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사랑에 대한 생각들이다. 주인공 알렉스가 모던 보이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듯 질주하고는 안나를 향해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라는 물음을 던졌다고 한다. 솔직히 영화를 본지 오래되서 그런 질문을 했었던가는 가물가물하지만 알레스가 몸부림치듯 질주하는 장면과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면서 뛰어가는 안나의 마지막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된다. 한가지 질문에서 시작된 사랑에 대한 의문. 번호를 달면서 조금씩 전개되는 생각을 쫓아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다방면에 잡학다식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잘난체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구나의 호기심에 한표 던진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그 이유를 구지 찾자면, 시집을 읽고나면 시집 가장 마지막에 달린 비평가의 무겁고 너무도 형이상학적인 분석에 짜증이 났던 것과 연관시키면 될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총동원하여 이미 자리잡고 있는 것에 너무도 많은 날개를 달아서 의미부여를 하거나 과도하게 비하하는 학자 내지는 비평가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때문이다. 아직 글읽기에 글쓰기에 서투른 한 독자로써 로쟈의 저공비행에 100%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흥미로운 탑승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도 그의 블로그에 무궁무진하고 자유로운 저공비행이 계속되길 바란다.
  • 인문학의 바다에서 헤매다
    오리 | 2009년 0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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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일종의 블룩 blook인데, 블룩은 블로그 blog와 책 book의 합성어이다. 다시 말하자면 <로자의 인문학 서재>는 저자가 자신의 블로그의 글들을 골라 편집하고 교정해서 만든 책이다. 책제목에 ...


     이 책은 일종의 블룩 blook인데, 블룩은 블로그 blog와 책 book의 합성어이다. 다시 말하자면 <로자의 인문학 서재>는 저자가 자신의 블로그의 글들을 골라 편집하고 교정해서 만든 책이다. 책제목에 걸맞게 이 책에는 문학, 영화, 예술, 철학, 지젝 읽기와 번역 등에 관한 각 방면의 글들이 실려 있다.


     이 책의 부제는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인데, 저자는 서문에서 책에 실린 글들이 본격적인 인문학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글을 읽다보면 그의 글들이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모두 다섯 개의 서재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다. 서재 1은 ‘로쟈의 문학노트’, 서재 2는 '로쟈의 예술 리뷰’, 서재 3은 ‘로쟈의 철학 페이퍼’, 서재 4는 ‘로쟈의 지젝 읽기’, 서재 5는 ‘로쟈의 번역비평’으로 되어있다. 이처럼 목차만 대충 훑어보아도 기가 질릴 정도로 다방면의 가볍지 않은 내용이 도열되어 있다.


     그는 인문학의 거의 모든 방면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관심은 종횡무진으로 여기저기로 마구 뻗어있었지만, 그런 관심이 일회성의 스쳐 지나가는 얄팍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다룬 분야들은 나름대로 깊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글이 너무 무거워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중간 중간에 가벼운 말들을 추임새처럼 넣곤 했다. 그럼에도 그가 쓴 글의 진중함의 빛깔은 묘하게도 손상이 가지 않았다.


     발문에서 천정환 교수가 말했듯이, 그는 ‘(아주)희귀한 박식가’이다. 한 분야에만 박식한 것이 아니라,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통합하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기를 팍 꺾어버리는 박식가이다. 그렇지만 그는 겸손하게 말한다. 자신이 책을 많이 읽은 게 아니라, 다만 앞에 나서다보니 그런 느낌을 주었을 것이라고.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알아야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곁다리 인문학자다. 더불어 ‘로쟈의 저공비행’은 아직도 많은 여정을 남겨놓고 있다.”


     내게는 이 말이 그가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서 있으며, 앞으로도 기나긴 저공비행을 할 거라는 말로 들렸다. 어쨌든 앞으로의 그의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책읽기를 사랑하는 그는, 사회적 네트워킹으로서의 책읽기를 다루었다. 그는 미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네트워킹이 부족한 고립사회, 즉 개방된 고립사회지만 서로 왕래하지 않는 사회라고 했다. 그래서 아무리 좌파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더라도 그 사회의 보수성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의사소통의 네트워킹을 강화해야한다고 했다. 즉 지식인과 대중 간의 거리를 좁혀야하고, 지식인이 대중화되고, 대중이 지식인화 되어야한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기본이 되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고, 서로 대화/토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될 때,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글은 그가 2004년 모스크바에 있을 때 쓴 글이지만, 현재 우리 상황에 대입해보아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나라 안이 몹시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는 그가 말하는 생활의 ‘기본’이 아직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저자는 러시아문학을 전공했지만 그의 관심은 러시아문학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바르트, 사르트르,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우리나라 작가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에까지 닿아 있다. 그리고 양념처럼 황혜선의 작품 분석과 작품 사진까지 넣어놓았다.


     그는 특히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서재 4에서는 본격적으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서재 이름도 ‘로쟈의 지젝 읽기’이다. 지젝은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 분석가이다. 그는 ‘MTV 철학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중적인 철학자이다. 그는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그의 그런 독해가 이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는데 어떻게 기여하는지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는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지젝은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말했는데, 저자는 이 ‘괴물’을 지지한다고 했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왜 지젝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물의 깊이를 모르고 무조건 바다에 뛰어든 아이처럼 어쩔 줄 몰랐다. 수영을 못해서 그저 물장구나 치러 들어간 바다가 너무 깊어서 당황했고, 그래서 무조건 개헤엄을 치며 거칠게 숨을 쉬었다. 험난한 파도를 만나서 겁에 질리기도 했고, 따가운 햇살에 눈도 크게 뜨지 못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다가 어찌어찌해서 다시 뭍으로 돌아왔고, 뭍에 돌아왔을 때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 안도감을 느꼈다. 어릴 때 누구나 이런 경험은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 자신의 무지함을 확인하는 과정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아서 그랬을 수도.


     로쟈의 서재에 겁도 없이 들어갔다가 청룡열차를 타고 현대 인문학의 세계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니 내가 뭘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나는 내가 머물고 있는 세계와는 좀 다른,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교차하는 낯선 세계를 맛보았다. 그 세계는 내 가슴 속에 묘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사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시간을 두고 야금야금 씹어서 음미해 보아야할 내용으로 가득 차있는 아주 ‘큰’ 서재이다. 그런 만큼 앞으로 자주 방문해보아야만 그곳에 숨어있는, 어렵지만 좀 색다른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로쟈의 서재는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재미를 줄지 모르겠다. 그 즐거움은 잠시 뒤로 미루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 도둑놈 심보와 자기 반성문
    stella09 | 2009년 0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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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서점에 블로그 활동이 가능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 모르긴 해도 7,8년 전쯤이 아니었을까?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그 무렵 전후로 해서 웬만한 인터넷 사이트들은 블로그라는 것을 만들...

    알라딘 서점에 블로그 활동이 가능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 모르긴 해도 7,8년 전쯤이 아니었을까?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그 무렵 전후로 해서 웬만한 인터넷 사이트들은 블로그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각자 자기네 사이트 블로그에 둥지를 틀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알라딘도 그에 뒤질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만큼은 블로그라고 하지 않고 '서재'라고 말하긴 하지만.     


    처음엔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굉장히 낮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제법 익숙해질 무렵 세상에 이것처럼 신기하고 재밌는 게 없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여기 저기 타인의 블로그를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했고 그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기쁨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몇몇 굵직굵직한 블로거들이 있었고, 그중 '로쟈'라는 분도 있었다. 


    이 분도 알라딘 서재 초창기 멤버중의 한 분으로 알고 있다. 내가 처음 이 분의 서재를 알고 드나들었을 때가 아마도 러시아 유학 말기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땐 공부하느라 바빴는지 드문 드문(적어도 지금만큼은 아닌) 페이퍼가 올라 오는 것을 지켜볼 수가 있었는데 그때의 느낌이 참 남달랐다.  다른 서재인들이야 국내겠지만 그는 해외에서 글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 마치 해외에 사는 누군가로 부터 편지를 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렇게 올라 온 글 또한 내공이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 여기엔 그렇게 내공있는 서재인들 몇몇이 있는데 선입견이겠지만 그들은 선듯 알은 체 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로쟈라는 분 역시 이미 오래전에 즐겨찾기를 했지만 쉽게 아는 체 하기가 뭐 했다.(즐겨찾기만 해놓고 인사 한번 제대로 못하는 건 무슨 짝사랑이냐?) 


    그런데 타인의 서재를 기웃거리다 보면 그 사람의 취향, 성격등을 나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또 그러기도 전에 섣불리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고 쉽게 짐작해 버리는 것 중의 하나는 서재 이미지다. 이것은 확실히 교란인 것 같긴한데, 서재 이미지가 사물이나 동물이 아닌 유명한 사람(대개는 영화배우를 쓰긴 하지만)을 쓰는 경우 선듯 그 서재 주인과 동일시 해 버리는 우를 범한다.   


    나의 경우 한 때 영화 배우 올리비아 핫세나 오드리 헵번을 서재 이미지로 쓴적이 있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들 배우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렇다면 나를 크게 오산한 것이다.  


    이미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로쟈란 아이디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나 역시도 처음에 로쟈 룩셈부르그를 생각했었더랬다. 하지만 난 희안하게도 이 분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뭐란 말인가? 이 모순은.  


    지금 그의 서재엘 가 보면 몇 년째 지젝의 이미지를 쓰고 있다. 몇 년째 같은 사람의 이미지를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는 지젝을 좋아하며 실제로 제젝과 닮아 있을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언젠가 아주 운이 좋게도 타인의 서재에서 그의 사진을 본적이 있다. 역시 이미지의 동일화는 위험한 것이며 동시에 교란으로는 이것만한 것이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젝 보다 못 생겻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사진만 가지고 말한다면 지젝 보다 그가 3배는 잘 생겼을 것이다. 또 모를 일이지. 지젝도 젊은 시절엔 빠지지 않는 미남이었을런지. 지금은 묵직한 할아버지 인상이 아닌가?  아마도 그가 몇 년째 지젝을 이미지로 쓰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지젝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아무튼 오래 전 어느 날이던가? 그가 곧 귀국을 할 것이며 귀국해서 보자는 짤막한 글을 본적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귀국했고 또 예의 짤막한 귀국인사로 시작해서 오늘 날까지 알라딘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자랑하는 서재인이 되었다.(조회수에 관해서 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유학 전에는 카테고리별로 그가 직접 쓴 글이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여기 저기서 주워 모은 것들을 한 페이퍼에 정리하는 형식으로 바뀐 것 같다. 하긴 바쁜데 언제 개인글을 쓰겠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로쟈라는 분, 굉장히 성실한 분 같다. 페이퍼 정리는 물론이고 여러 댓글러들에게도 친절하게 답글을 단다. 다 읽어 보진 않지만 어떤 이의 댓글에 단 답글엔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내가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도 바뀌었다.


    그 많은 페이퍼들을 어떻게 했나 했더니 어느 새 그것들을 또 재정리해서 육화해 책을 냈다.  


    얼마 전, 그가 책을 냈다고 이벤트를 하겠다는 공지글이 올라왔다. 그것은 정말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은 이벤트를 해도 이 분만큼은 이벤트는 안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이 이사하면 떡돌이도 하는데 자신의 책이 처음 나오는데 이벤트 하는 거야 당연하지 않을까?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벤트 공고문이 의외로 재밌어 나는 한참 킥킥대고 웃었다.  


    원래 항상 웃기는 사람 별로 웃기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별로 안 웃길 것 같은 사람이 진짜 웃기는 법이다. 한마디로 그의 유머는 묵직했다. 이벤트 글 하나가 이만큼 사람을 웃길 수 있다니! 물론 이벤트 상품은 막 출판되어 나온 그의 띠끈 따끈한 책을 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벤트 미션이 녹녹치 않아 책을 보고는 싶었지만 애저녁에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좋은 기회에 책을 읽어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렇게 많은 자료들을 그러 모으더니 이런 근사한 책을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저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책은 그가 낸 이벤트 미션 보다 2배는 어렵다. 나는 그것이 그가 글을 어렵게 쓰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나도 나름 책을 좋아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읽는 책들은 지극히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모름지기 문.사.철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폭넓게 읽어야 하는데 나는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류의 책만 좋아해 이 책 조차도 버거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요즘 인문학의 흐름을 개인적인으로 조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부분은 그나마 나의 얕은 식견으로 짐작이 가능한 부분도 있었지만, 어떤 부분은 좀 어려웠다. 읽으면서 스스로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그러니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나의 무지에 대한 반성의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새삼스러운 말이 되겠지만, 블로그가 생기니 소통이 보다 용이해졌고 여러 사람의 생각이나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 좋다. 공부해서 남주냐고 하지만 공부는 정말 남에게 주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뺏어 올 수 있어야 한다. 즉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로쟈님의 서재를 찜해 놓고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그의 페이퍼를 읽게 되면 우리 역시도 인문학에 눈이 열릴 것이다(로쟈님 정도는 아니어도). 하지만 이도 매번 용이하지가 않다고 핑계를 댄다. 게을러서가 첫번째 이유요, 내가 관심없는 분야라고 그냥 눈도장만 찍고 마는 것도 부지기 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의 서재는 확실히 지식 창고 개방형이다. 그의 서재에서 뭐 하나를 건져가도 건져 갈 수 있으니 대놓고 도둑놈 심보가 되어야 하고 더 탐해야 한다. 또한 고마워 해야 할 것이다. 이 분이 아니었으면 일일이 발품 팔았어야 하는 건데 매번 정리해서 창고에 쌓아두고 퍼가도 뭐라고 하지 않으니.  


    어림 짐작을 해 보니 그의 나이가 40대 초반은 지나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80년대에 초반에 중학생이었다고 하니) 사십. 불혹의 나이기도 하지만 뭐 하나에 정통할 법한 나이이기도 하다. 읽으면서 나는 뭐했나 돌아 보게도 된다.  


    지금은 대충 훑는 것에서 리뷰를 썼지만 훗날 내가 인문학에 바늘 구멍 하나 정도 통과할 정도의 식견이 생기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할 것 같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권하고 싶은 책이다.  


     


  • 인문학 색다르게 읽기.
    살리에르 | 2009년 0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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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엔 다르다. 10년이 아니라 1년만 지나도 세상이 확확확 바뀌는게 느껴진다.이른바 IT산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기술이 계속 나오고 거기에 맞춰 사람들의 삶...
    옛날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엔 다르다. 10년이 아니라 1년만 지나도 세상이 확확확 바뀌는게 느껴진다.
    이른바 IT산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기술이 계속 나오고 거기에 맞춰 사람들의 삶도 변해가다보니깐 1년이란 세월이 요즘엔 아주 많은 것들이 이루어지는 시간인것이다.

    그전에는 없던 책 출판형태가 나타나는 것도 그런 일환이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적은 글들이, 종이에 인쇄되어 책으로 나오는 출판의 형태로 나오는게 그 하나이다.
    어떻게보면 남에게 보이는 '일기'를 쓰는 셈인데 블로그라는 글쓰는 공간이 큰 촉매제가 되었다고 볼수있다. 자신이 가진 여러가지 지식을 그냥 풀어놓거나, 아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소박한 목적에서 시작했을수도 있는 것들이 수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면서 나름 막중한 임무를 띄게 되는 경우도 많다.

    여러 분야의 많은 글잘쓰는 고수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나 사진을 바탕으로 책을 낸 가운데 여기 또 한명의 글쓰기 스타가 책을 냈으니 이번엔 인문학자다.
    '로쟈'라는 필명을 쓰는 러시아문학전공자라고 하는데 지은이 스스로의 말에 의하면 '하는
    일에 비해서  좀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인문학쪽의 책을 곧잘 읽기는 해도 블로그를 일일이 찾아갈만큼 열성적이진 않은 나도 언뜻 들어본 닉넴이니 유명하긴 유명한 모양이다.

    사실 지은이가 주로 서식하면서 글을 풀어놓는다는 인터넷 서점에 나도 블로그를 갖고 있긴 해도 서평을 저장한다는 의미로만 활용할뿐, 소통의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기에 다른 블로그에도 그리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처음 방문을 해봤는데 유명인이 된  이유를 알았다. 보기 좋게 정렬된 여러 분야의 논리정연한 글들을 보니 과연이다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걸로 끝이었다. 눈 아프게 인터넷으로 긴 글을 보는게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런 책은 참 반갑다. 물론 올린 글을 전부 책으로 낸 것도 아니고 책으로 펴내면서 고친 부분도 있지만 일단 편한 자세로 내가 읽고 싶은 부분을 눈 아픔 없이 읽을수있다는게 좋았던 것이다.

    나와는 다른, 전문적인 인문학자의 책읽기는 어떠한가에 대해서 기대를 한건 좋았지만 책을 펴는 순간 살짝 한숨이 나왔다. 그 옛날 책만 봐도 한숨이 나왔던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풀어도 풀어도 다 못풀 수학문제로 가득찼던 그 책을 보고 느꼈던 느낌이 이 책에서도 느낀 이유는 두꺼운 책에 글자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많은 내용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분권을 하지 않고 한권에 넣은 그 뜻은 알겠으나 기본적으로 머리 아픈 것은 어쩔수 없었다.

    책은 크게 5가지 부분으로 나눈다. 지은이가 러시아 문학 전공자답게 러시아 문학과 책읽기, 문체등에 관한 이야기가 한 꼭지를 이루고 두번째로는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그리고 철학, 지젝, 번역에 관한 이야기가 뒤를 잇는 형식으로 책 내용을 이루고 있다.

    사실 내용 자체는 크게 기억에 남는것이 없는게 지은이가 언급한 책들중에 읽어본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읽었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읽었다고 할수는 없지 않은가.
    지젝같은 경우에는 이름만 들어본 경우라서 잘 읽히지도 않았다. 제일 편하게 읽었던 부분은 영화를 이야기한 예술쪽이다. 거기서 이야기한 영화를 거의 다 본 탓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인문학자가 생각했던 부분을 비교하면서 읽으니 흥미로왔다.

    이책에서 가장 공감이 갔던 부분은 번역에 관한 문제다. 우리나라의 번역부분이 문제가 많은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러시아어 전공자로써 이른바 외국어를 다루는 입장에서 번역을 잘해야한다는 그의 주장에 적극 공감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글로만 지식을 축적할수는 없기에 외국인이 쓴 책들이 적극 들어와야하는데 그만큼 번역이 중요한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것이 문제일것이다. 지은이같이 번역에 대해서 깐깐한 사람이 많아져야 우리나라의 번역 문학도 좋아지려나.

    글은 전체적으로 그리 쉽게도, 그리 어렵게도 쓰여지진 않았다. 인문학에 관한 기본 소양이 없다면 어렵게 느껴질수도 있는 내용인데 찬찬히 읽는다면 나름의 재미도 느낄수 있는 책이었다. 다만, 많은 내용을 한권에 넣으려고 한건지 아니면 편집상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활자로 가득찬 책을 보는게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글자가 빽빽한 책을 잘 안 읽은 탓이려니 하긴 해도 선뜻 완독하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았다.

    어쨌던 이런 책은 많이 나와야한다. 아무리 첨단과학의 기술이긴 해도 그것을 만들고 발현하는것은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기술의 밑바탕에는 인문지리적인 것이 기본이 되어야 제대로된 것이 나올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멀어진 인문학을 가깝게 다가가게 하는 이런 책들이 많이 나오길 바란다.
    누구나 인문학을 편하게 읊을수 있을때까지는 지은이에게 인문학 전파의 소임을 부탁할수밖에 없겠다.
  • 로쟈, 고공비행하다
    cpj1001 | 2009년 0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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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이미 인터넷에서는 많이 알려진 유명 블로거다. 지은이가 밝힌 것처럼 나도 처음에는 ‘로쟈’라는 필명이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따온 것으로 여성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
    지은이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이미 인터넷에서는 많이 알려진 유명 블로거다. 지은이가 밝힌 것처럼 나도 처음에는 ‘로쟈’라는 필명이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따온 것으로 여성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쟈‘라는 필명은 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에서 따온 것이었다. 지은이가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제서야 왜 ’로쟈‘라는 필명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올린 페이퍼를 들여다보면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인문학자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지은이는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분야들을 건드리는 그와 같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는 지은이의 겸손이라고 본다. 정통 인문학자가 보여주는 정형적이고 틀에 박힌 이야기들보다, 지은이는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시니컬하게, 때로는 독설이 넘쳐나게, 마치 리듬을 타듯이 속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문학 책을 뒤적이다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 때문에 인문학은 재미없고 따분한 학문으로만 여기는 것이 현재 우리 인문학의 모습이다. 개인적으로도 몇 장 뒤적이다가 도저히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어서 책을 덮어두는 경우가 종종있었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것이 실은 독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인문학자들에게도 있다는 취지로 이야기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지적하는 바와 같이 오역 투성이의 번역본은 그런 무책임함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경우라고 한다.

    그런데 지은이의 글은 일단 쉽다. 그리고 편하다. 물론 어려운 부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부분도 몇 번 읽으면 대체적인 문맥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다른 책들은 몇 번을 고쳐 읽어도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제대로 알고 글을 쓴 건지 의심이 들 정도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책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하고 자신도 다시 거기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런 생각은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써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본서 제90쪽 참조)
    그런 점에서 지은이의 글쓰기는 흡족스럽고 즐겁다.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다섯 개의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로쟈의 문학 노트’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1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에서는 지은이의 책읽기에 대한 생각과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자신의 전공인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로쟈의 예술 리뷰’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2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에서는 황혜선에 대한 글을 제외하면 전부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파트리스 르콩트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 카트린 브레야의 ‘로망스’, ‘지옥의 해부(포르노크라시)’, 에밀 쿠스투리차의 ‘인생은 기적처럼’, 김기덕의 ‘사마리아’, ‘빈집’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김기덕의 영화에 대한 비평은 김기덕 영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로쟈의 철학 페이퍼’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3 “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에서는 주로 니체와 데리다, 그리고 벤야민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철학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은 관계로, 이 책에서 이 부분은 읽기가 쉽지 않았다. 법, 정의, 폭력 등 어떻게보면 서로 조화될 것같지 않고 대립적이며, 단순한 소재의 이야기일 것 같은데, 지은이는 이를 날줄과 씨줄로 엮어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로쟈의 지젝 읽기’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4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에서는 지은이의 지젝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온다. 특히 지젝과의 가상 대담을 엮은 부분과 지젝을 통해 한국 문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인상깊었다. 지젝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우리시대의 엘비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지젝에 대해 애정공세를 퍼붓는 지은이의 이야기에 지젝에 대한 책을 읽어야할 것같은 강한 끌림이 일어났다. 물론 지은이가 지젝을 잘 설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차후 지젝에 대한 지은이의 연구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로쟈의 번역비평’이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5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에서는 이제껏 보아온 지은이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의 번역 현실에 대해 아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 없다면 아예 책을 내지 말라며 독설에 가까운 말을 뱉어낸다. 지은이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껏 우리가 원래 인문학은 어려운거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겨버린 것도, 일정부분은 번역자의 오역과 무신경이 낳은 부산물의 일부일 수 있다. 지은이의 책에 대한 애정과 번역자의 노고가 느껴지는 부분으로 너무나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

    두툼한 책을 덮고 나니 새벽이다. 많은 생각들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지은이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글을 읽는 시간은, 척박한 인문학적 토양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간 지은이의 모습을 각인하게 되는 시간들이었다.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며 즐거운 저항이니, 악착같이 즐겁게 책을 읽으라”고 말하며 오늘도 컴퓨터 앞에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지은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은이가 오랜 시간동안 고민하고 생각한 내용들을 한꺼번에 소화하기란 벅차다. 틈날때마다 꺼내 읽으며 지은이의 지적 유희에 빠져들고 싶다.

    책의 첫 부분인 프롤로그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지은이는 백범의 「나의 소원」중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라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큼이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니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의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본서 제16쪽 참조).”

    무슨 이유로 지은이가 그렇게 열심히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 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은이, 로쟈는 이제 고공비행하고 있다. 온라인으로만 접하던 사람들을 넘어, 오프라인으로 사람들을 접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해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로쟈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볼 수 있도록 더 높이 비행해주었으면 한다.
  • 인문학에 대한 충분한 자극제다.
    행인 | 2009년 0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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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과문함 탓인지 로쟈란 블로거에 대해 잘 몰랐다. 자주 가는 카페 등에서 낯익은 이름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내공에 놀라곤 한다. 하지만 인문학에 관심만 있지 제대로 잘 읽지 않는 나쁜 습관과 집중을 요구하...

    나의 과문함 탓인지 로쟈란 블로거에 대해 잘 몰랐다. 자주 가는 카페 등에서 낯익은 이름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내공에 놀라곤 한다. 하지만 인문학에 관심만 있지 제대로 잘 읽지 않는 나쁜 습관과 집중을 요구하는 문장들을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이 블로그는 낯설다. 인터넷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고수들의 서평은 읽지만 다른 종류의 글들은 점점 읽지 않는 요즘을 생각하면 이 책은 나의 인식을 조금은 바꿔놓을 것 같다. 이 책을 선택하기 전 둘러본 서재는 높은 내공을 보여주는 글들이 많았고, 이 때문에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모두 다섯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 예술, 철학, 지젝, 번역비평 등이다. 사실 처음 두 서재는 조금 진도를 따라가고,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뒤로 가면서 그가 품어내는 열기와 내공이 나를 버겁게 만들었다. 가볍게 읽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은 하였지만 아마추어(?)가 이미 프로의 단계를 넘었고, 그 깊이와 폭이 예상을 초과하였다. 그래서인지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게 되는 순간도 있었고, 읽다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눈으로 읽고 지나간 부분도 많다. 뭐 이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책 읽으려고 빼놓은 시간을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서 리듬이 빼앗긴 것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이유의 일부일 뿐이다.


    다섯 서재로 구성하였다고 하지만 그의 인터넷 서재는 더 많은 글들이 있다. 그 중 일부를 발췌하여 엮은 것이다. 그의 글 전체를 읽은 것은 아니지만 괜히 어렵고 난해한 글들만 모아서 책으로 내놓은 것은 아닌가하고 남 탓을 한다. 물론 그의 책읽기를 통해 나의 현 위치를 파악하고, 새롭게 인식의 지평을 넓힌 부분도 많다. 겉멋과 약간의 호기심과 관심으로 사놓기만 한 무수한 인문학 서적들이 나에게 손짓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습관이 단숨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각 서재마다 인상적인 글이 있다. 문학의 서재에선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를 비교 분석한 글이다. 김훈의 경우 소설로 먼저 만나면서 그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고, 김규항은 아직은 낯설고, 고종석은 이름만 기억하는 작가였다. 로쟈는 이들을 상 위에 올려놓고 문체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문장이 나의 글쓰기의 모범이 될 만한 것들이 가득하고, 어떤 부분은 다른 사람의 좋은 글을 보고 읽고 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밴 것도 있다. 90년대 하루키 열풍이 몰아쳤을 때가 순간 생각난다.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의 문장에 매혹되었던가.


    예술로 넘어가면 대부분 영화 이야기로 가득 찬다. 본 영화도 있고, 보려고 마음먹었지만 놓친 영화도 있다. 그 중에서 김기덕과 레오 카락스의 경우는 분명하게 다른 시선과 해석이 옛 기억을 되살리게 만들었다. 세 번째 서재에서 니체를 지나 벤야민으로 오게 되면 나의 밑천이 쉽게 바닥이 난다. 하지만 다시 지젝의 서재로 오면서 바닥을 뚫을 정도로 변한다. 로쟈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인물인 듯한 지젝의 철학과 해석들이 한 줄을 읽고 다시 읽고 하는 순간들로 점철되고, 전체적인 맥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서 그 재미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 이것은 다섯 번째 서재에서 다룬 번역이 문제와도 연결된다.


    번역비평 글에서 자신도 번역을 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인문학 번역서를 읽을 때나 전문가의 글을 읽을 때면 늘 이상한 문장들 때문에 고민하고, 나의 낮은 지력을 탓한다. 그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지만 쉽게 이해한 듯한 글들을 보면 더욱 깨갱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장들을 몇 번 만나고 나면 책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읽었다는 기록만 하기 위한 노력으로 바뀌게 된다. 한때 시간이 있을 때는 소설 중 이상한 문장이나 번역이 있으면 원서와 비교한 적도 있다. 대충한 듯한 번역과 역자의 지식 부재를 느끼곤 점점 나 자신이 둔감해졌다. 이제는 이런 문장이나 단어가 나와도 그냥 놓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역자 탓만 할 수 없다. 나의 노력이 부족한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폭 넓고 깊이 있는 지식의 향연을 들여다보면서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이익이 얼마나 거대한지 실감한다. 점점 게을러지고 인문학에 대해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 시점에 로쟈의 서재는 충분한 자극제다. 이 책이 쉽게 읽힌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지하게 부럽다. 언제 시간 내어 다시 몇몇 서재는 깊이 있게 읽어봐야겠다.

  • 로쟈와 함께 인문학 비행
    이매지 | 2009년 0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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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인문학하면 어렵고 고리타분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편견에 더해 소위 돈 안되는 학문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인문학은 대학에서도 퇴출되는 비극을 겪고 있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는 인문학...

      흔히 인문학하면 어렵고 고리타분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편견에 더해 소위 돈 안되는 학문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인문학은 대학에서도 퇴출되는 비극을 겪고 있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는 인문학. 하지만 누가 인문학에 관심이 있을까 싶을 때 인문학에 대한 썰을 풀어가며 인기를 모은 블로거가 있으니 바로 이 책의 저자 로쟈(이현우)다.


     


      인문학적 지식에 대한 갈증은 있었지만 나 또한 인문학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에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라딘에 둥지를 틀면서 로쟈님의 글들을 읽게 됐고 어쩌면 인문학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더 부드러운 학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뜻 나서서 친해지기엔 왠지 모를 포스가 느껴져 항상 멀리서 그의 글을 야금야금 읽으며 지젝을 비롯해 데리다, 벤야민 등의 거장들의 단면을 읽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내 스스로 만난 건 지젝 밖에 없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책은 서재에 올렸던 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로쟈의 문학 노트, 로쟈의 예술 리뷰, 로쟈의 철학 페이퍼, 로쟈의 지젝 읽기, 로쟈의 번역비평 등 총 다섯 개의 서재로 구성되어 있는 책은 그동안 서재에 올렸던 글을 손본 것들이다. '너무 쉽거나 어렵지 않은 글, 너무 말랑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글'을 모았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나처럼 인문학 초짜가 읽어도 그리 어렵지 않게 구성되어 있다. 간간이 어려운 구절이 있기도 했지만 몇 번 곱씹다보면 이해가 되는 정도라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생 초짜라면 어려울 수 있겠지만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적인 독자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간 빡빡한 느낌이 들어서 한 번에 한 챕터 이상 읽기는 힘들었지만, 굳이 순서대로 읽기보다는 마음가는대로 한 챕터씩 읽으며 느긋하게 완독할 수 있는 책이었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블로거 로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하는 책. 한 번 더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 그의 앎과 주관으로 꽉 찬 서재에 학문적 욕구가 밀려오다...
    재윤맘 | 2009년 0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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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선진국인 우리나라. 그리고 인터넷이란 공간에서의 시민(이른바 네티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끔은 허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고는하는 인터넷에서 또 하나의 삶을 펼쳐가고 있는 것이 아주 자연스...

    인터넷 선진국인 우리나라. 그리고 인터넷이란 공간에서의 시민(이른바 네티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끔은 허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고는하는 인터넷에서 또 하나의 삶을 펼쳐가고 있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현실이다.


    인터넷에서의 삶을 펼치고 꾸려나가는 공간으로 자신의 집과 같은 ’블로그’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블로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블로거가 되는 것이다.


    블로그란 자신의 공간을 오늘도 제각각 꾸려가는 수많은 블로거들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고유한 닉네임으로 사이버사회에서 유명인이 된 네티즌들이 또한 적지 않다. 나름의 색깔과 분위기로 실제의 모습이나 삶이야 어떻든 또 하나의 자신을 살고 있는 네티즌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네티즌이자 블로거로 블로그들 사이에 유명인이 된 ’로쟈’의 글을 담고 있다. 모 인터넷서점의 서재 한 켠에 차곡차곡 채워가던 그의 서재가 블로거들의 눈에 띄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가상의 공간이 아닌 실체인 ’책’을 당당히 우리곁에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서재의 주인장이라 할 수 있는 ’로쟈’는 물론이거니와 수 많은 블로거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밀려온다.


    몇 년째 차곡차곡 그의 서재에 쌓인 그의 작품들이 다섯 가지 주제로 분류되어 담겨있는 두께도 내용도 묵직한 실체를 받아들고 한동안 부러움에 선뜻 책장을 펼치지 못했다.


    노어노문학 전공, 노어노문학 강사로 또 러시아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그의 이력때문인지 ’곁다리 인문학자’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실용적인 분야를 공부한 내게는 그의 다섯 서재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가볍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서재인 ’문학 노트’부터 예사롭지 않게 펼쳐지는 그의 앎에의 전개와 주관적인 시선에 순수하게 호기심과 흥미로움에 그의 서재를 들여다보고자 했던 나의 시도가 참으로 한심하게 여겨졌다.


    인문학적 아니 순수학문적 깊이나 주관이 전혀없는 내게는 새로운 묵직함을 던져주는 로쟈의 서재. 오기로라도 그의 서재 구석구석을 파헤치고픈 욕심이 끈기로 모습을 바꾸어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우선 그의 첫 번째 서재인 ’문학 노트’와 조금은 부담이 적은 듯한 두 번째 서재 예술 리뷰’ 그리고 그가 장래에 쓰고자 한다는 지젝에 대한 네 번째 서재와 다섯 번째 ’번역 비평’을 욕심과 오기로 읽고 말았다. 읽었다는 것의 의미는 이해했다기 보다는 그저 활자를 읽어낸 것이다. 솔직히 내게, 몇 번을 곱씹어 읽어도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인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으며 그저 흥미로 재미로 책을 읽고 느끼는 나의 독서에 대한 일차원적인 생각이 어쩌면 그만큼 아는 것이 없음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밀려온다.


    뒷표지의 ’우리 시대의 대중지성 로쟈, 훔치고 싶은 그의 서재’라는 문구에 문득 그의 삐딱함을 부려본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의 서재가 마땅(?)한 것이라고.......


    로쟈의 서재는 놀라움과 질투심을 일게하지만, 그의 앎과 주관에 대해서는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이다. 문득 학문에의 욕구가 밀려온다.

  • 독서 혹은 반성
    낙서가 | 2009년 0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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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나 예상했던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녹록치 않은 책이었다. 아마 그것은 로쟈의 책임이 아니라, 내 책임일 것이다. 나는 책을 다양하게 읽지도 않았고, 어느 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다. 독서에 있...
    역시나 예상했던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녹록치 않은 책이었다. 아마 그것은 로쟈의 책임이 아니라, 내 책임일 것이다. 나는 책을 다양하게 읽지도 않았고, 어느 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다. 독서에 있어서 깊이도 폭도 없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짐작해본 로쟈의 독서의 깊이와 폭은 대단해 보였다. 그의 독서는 문학과 예술과 철학을 종횡했고, 한 권의 책으로 엮인 것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사유의 깊이도 있었다. 인문학 서재라는 제목이 엉터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를 쌓아올리기 위해 독서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지식이든, 인격이든, 상상력이든, 단순한 호감이든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는 나의 내면에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쌓아올리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쌓아올린 것들이 무참히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좋아한다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었던 어떤 작가는 '소설을 못쓰는' 작가가 되어 있었고, 감히 내가 범접할 수 없었던 한 철학자의 철학은 '아줌마 철학'이 되어 있었다. 쌓아올린 것을 무너뜨리는 독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책을 읽을 줄만 알았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사유를 펼칠 줄 몰랐던 나에게 어쩌면 이것은 예정된 시련인지도 모른다. 내가 독서를 통해 쌓아올렸던 것들이란 결국 내것이 아니었다. 빚 내서 집과 주식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한 꼴이다. 그렇다고 해서 로쟈의 독서를 무조건 따라갈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것이야 말로 언젠가 무너질 또 하나의 그 무엇을 쌓아올리는 일일 게다.

    이제는 빚을 지지 않고, 성실한 노동의 대가를 열심히 모으면서 살겠노라는 교과서적인 다짐을 해보지만, 잘 될지는 모르겠다. 벌써 책을 끝까지 정독하지 못한 내가 이 책에 대해, 또 독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 곁다리 인문학 여행
    dasom | 2009년 0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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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인문학은 인간이 처해진 조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인문학의 분야로는 철학, 문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여성학, 미학, 예술, 음악등이 있다. 아주 오래전 ...
    인문학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인문학은 인간이 처해진 조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인문학의 분야로는 철학, 문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여성학, 미학, 예술, 음악등이 있다.
    아주 오래전 우리의 조상들은 인간 본연의 모습에 많은 관심과 연구를 통해 인문학 분야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그 옛날 쓰여진 많은 학문적 결과물은 현재 사회적, 과학적 문제에 적용시켜도 손색이 없는 분야들 또한 아주 많다.
    인문학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우리들의 삶속에서 같이 숨쉬어 왔고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학문 분야이다.

    인문학의 중요성은 이루 말 할 수 없지만 근래에 들어와 인문학의 어려움에 처한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인문학을 배우면 취업에도 어려워 대학에서도 학생들이 그리 반기는 과목도 아니고 그저 교양과목으로 생각하고 깊이있는 연구는 어림도 없다.
    또한 학문 자체에서 느껴지는 지루함을 생각하면 그 접근성 또한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한 원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교양과목이 아닌 재미없는 인문학이 아닌 재미있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주제를 담고 있는 필독서로써 이 책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이 책은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로쟈의 저공비행’이라고 불리는 블로그에 게재했던 문학과 영화, 예술, 철학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로쟈의 문학노트, 로쟈의 예술 리뷰, 로쟈의 철학 페이퍼, 로쟈의 지젝 읽기, 로쟈의 번역비평으로 새롭게 구성하여 이야기 하고있다.
    이 책은 부제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나와 있듯이 전문적 인문학 서적이 아닌 쉽고 재미있는 인문학 분야의 내용들을 소개하면서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끔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어렵게만 느껴졌던 인문학 분야에 대한 선입견이라고 할까 접근성에 있어 일단 편안 마음으로 인문학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고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통해 내 자신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책 속의 한줄
  •   로쟈의 인문학 서재 中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이라고 다르겠는가.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그게 독서 문화이고 출판문화다(거꾸로 괴로움을 주는 건 '문화'가 아니다. 날림 출판은 문화가 아니다). 그런 즐거움 속에서야 우리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 즐거움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p.17

    *군자란 완성된 인간이지만, 그 자기완성이란 건 미래완료형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진정 완성된 인간이란 끊임없이 완성되어가는 인간이다. 그래서 '자왈' 한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하며, 끊임없이 쓰고 또 써야 한다. 글쓰기가 자동사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룬다는 '타동사'는 자동사의 극한이며, 자동사의 미래완료형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즐거움' 또한 끝이 없다. 그런 즐거움을 배우고 익히는 것, 즉 다시 가르치고 베푸는 것이 나는 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해서,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언제나 '즐거운 지식'이며, '새로운 계몽주의'란 '즐거운 계몽주의'다. 그것이 시민의식의 함양이고 시민교양의 양생이다. 시민의 학습이고 합창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대라! 그것이 한편으론 시인 이성복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과의 연애'다. -p.19~20

    이매지 | 2009-08-16 00:00:00
  •   로쟈의 인문학 서재 中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이라고 다르겠는가.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그게 독서 문화이고 출판문화다(거꾸로 괴로움을 주는 건 '문화'가 아니다. 날림 출판은 문화가 아니다). 그런 즐거움 속에서야 우리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 즐거움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p.17


     


    *군자란 완성된 인간이지만, 그 자기완성이란 건 미래완료형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진정 완성된 인간이란 끊임없이 완성되어가는 인간이다. 그래서 '자왈' 한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하며, 끊임없이 쓰고 또 써야 한다. 글쓰기가 자동사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룬다는 '타동사'는 자동사의 극한이며, 자동사의 미래완료형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즐거움' 또한 끝이 없다. 그런 즐거움을 배우고 익히는 것, 즉 다시 가르치고 베푸는 것이 나는 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해서,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언제나 '즐거운 지식'이며, '새로운 계몽주의'란 '즐거운 계몽주의'다. 그것이 시민의식의 함양이고 시민교양의 양생이다. 시민의 학습이고 합창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대라! 그것이 한편으론 시인 이성복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과의 연애'다. -p.19~20

    이매지 | 2009-12-18 13: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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