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 지음
2009-04-15
11,000원 | 294쪽 | 212*142mm
종합평점 : 4.5 ( 1 명)
<경마장 가는 길>의 작가 하일지의 열 번째 장편소설. 우수에 찬 북유럽의 설원을 배경으로, 주어진 운명처럼 노스탤지어의 힘에 끌려 들어가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담았다. 소설 속에는 현실적인 환상, 환상적인 현실이 치밀하게 엮인 뫼비우스적 세계가 펼쳐진다.

40대 동양인 남자 할이 어느 추운 겨울 자신의 고국인 우주피스 공화국을 찾아 리투아니아로 입국한다.
한(Han) 주재 우주피스 공화국 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한에서 살다 우주피스가 주변국에 점령되자 망명한 후, 최근 우주피스가 독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유골을 묻기 위해 고국 우주피스 공화국을 찾은 것.

택시기사에게 우주피스 공화국으로 가자고 하자 엉뚱하게도 호텔 우주피스에 데려다주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블라디미르라는 자가 우주피스 공화국에 대해 알 거라며 에거스 씨 댁 파티에 가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우주피스 공화국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농담으로 만들어 낸 가짜 공화국이라며 그를 놀린다.

곳곳에서 우주피스 공화국의 흔적이 발견되며 우주피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나지만, 모두 우주피스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언가 진실을 은폐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가 우주피스 공화국을 찾는 일을 방해한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그곳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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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운전사 요나스
호텔 우주피스에서 만난 사람들
에거스 씨 댁의 파티
은발의 블라디미르
밤길에 만난 사람들
국무총리 토마스
빌마의 사랑
마노 카비나에서
요르기타의 남편
식민지의 시인
꽃 파는 소녀 마리아
서랍 속의 제비들
아듀티스키스의 요르기타
비?레 강가에서

작품 해설 문학의 슬픔과 아름다움_이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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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간 낯설고 새로운 소설을 끊임없이 창조해 온 하일지 문학의 절정!
현실적인 환상, 환상적인 현실이 치밀하게 엮인 뫼비우스적 세계

<경마장 가는 길>의 작가 하일지가 오랜 침묵을 깨고 열 번째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하일지의 20년에 걸친 문학적 대장정은 신작 <우주피스 공화국>을 통해 거대한 언어의 바벨탑을 완성했다. “하일지의 ‘경마장’은 우리 문학사에서 1960년대의 ‘무진’, 1970년대의 ‘삼포’, ‘난장이’의 뒤를 잇는 1990년대의 문학사적 사건이다.”(문학평론가 김윤식)라는 평가를 받았던 작가는 <우주피스 공화국>에서 지금까지의 소설 세계를 일신하는 경이로운 작품 세계를 보여 준다. 주어진 운명처럼 노스탤지어의 힘에 끌려 들어가는 이 신비로운 이야기는 현실적 환상과 환상적 현실이 씨줄과 날줄로 치밀하게 엮여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 우수에 찬 북유럽의 설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경이롭고도 매혹적인 이야기에서 우리는 따스한 품격과 시적인 아름다움이라는, 하일지 문학의 새로운 진경을 만날 수 있다.

● 한국 현대 소설 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1990년 하일지의 등장은 한국 문학의 거대한 전환점을 보여 주었다.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가차 없이 폭로하고 인간 심리의 출구 없는 상황을 핍진하게 그려 낸 다섯 편의 ‘경마장’ 시리즈를 통해 하일지는 문단과 독자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이후 한국 문학의 진로를 전향시켰다. 그는 지금까지 20년 동안 단 한 편의 단편소설도 발표하지 않은 채 장편소설로만 그의 실험적인 문학 세계를 끈질기고 치열하게 추구해 왔다.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새>, <진술>, <마노 카비나의 추억>에 이르기까지 매 작품마다 그의 문학 세계가 보여 준 전례 없는 내용과 형식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하일지 소설의 진가는 재발견되며 점점 더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런 그가 다시 한번 놀랄 만한 작품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우주피스 공화국>에서 형용사 및 유추, 은유, 작가의 임의적 판단이나 느낌 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카메라로 피사체를 포착하듯이 치밀하고 집요하게 객관적인 묘사를 해 낸다. 작가가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독자에게 장면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독자와 작품의 거리는 더 가까워지고, 독자는 더욱 속도감 있게 작품을 읽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동일한 상황이 변주되며 모티프가 반복되는 순환적 구조를 통해 소설적 실험을 보여 준다. 언제나 한국 문학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작가 하일지, 그의 신작 <우주피스 공화국>은 21세기 한국 문학의 방향 전환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 그의 언어가 만들어 내는 기묘한 우주, 그 미로 속에 다시 한번 빠져들다

이 소설은 하나의 완벽한 미로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우주피스 공화국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독자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시간과 공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한히 반복되는 순환적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무엇이 현실인지 무엇이 환상인지 혼란스러워지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를 스스로 묻게 된다. 현실적인 환상과 환상적인 현실이 치밀하게 맞물린 뫼비우스적 세계는 끊임없이 돌고 도는 미로 속에 갇힌 인간의 숙명적 구조를 보여 준다. 독자들은 크레타 미궁의 테세우스처럼 실을 따라가다 보면 역시 실 끝을 잡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영원히 미로를 빠져나올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진정한 ‘나’를 조우하는 것이다. 주인공 할이 찾고자 하는 것은 ‘우주피스 공화국’이라는 잃어버린 조국이 아닌, 잃어버린 시간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추억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므로, ‘강 건너 저쪽’ 즉 피안으로서의 우주피스 공화국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궁극의 나라다. 이 영원한 뫼비우스의 미로를 탈출하는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미로가 되는 것. 그리하여 할은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우수에 찬 북유럽의 진경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며, 진실을 찾아 끝없이 펼쳐진 눈 속을 걸어가는 할의 모습은 장면마다 아름다운 그림을 만든다. 리투아니아의 비?레 강 이쪽과 저쪽에서 할이 젊은 요르기타와 늙은 요르기타를 만나 느끼는 기시감은 인간의 삶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하일지 문학의 핵심적 통찰을 박진감 있게 보여 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인간 상실의 황폐함은 이 소설에서 위로받고 길을 찾아낸다. 충족되지 않는 갈망을 안고 노스탤지어의 꿈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그곳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어 보였던 우주피스 공화국이 있다. 눈 덮인 광야에 홀로 서서 하늘을 가득 채우며 날아오르는 새 떼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모습은 새로운 세기를 맞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 21세기의 바벨탑, 시공을 초월하는 공통의 서사로 세계 문학 위에 우뚝 서다

이 소설은 소통 불가능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21세기의 바벨탑’이다. 사람들은 우주피스의 존재를 은폐하고 부정하며 할이 쌓아 나가는 바벨탑을 끊임없이 무너뜨린다. 그런가 하면 우주피스의 존재에 대해 아는 인물들은 갑자기 종적을 감추거나, 또는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할이 외무성에 찾아갔을 때 빌마가 통역하는 장면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그로테스크하다. 또한 할이 우주피스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말할 수는 없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하일지 문학이 기존 한국 소설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은 독자에게 어떠한 진실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 미학은 인간과 그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 독자에게 교양과 지식을 주고,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깨우치려 하는 기존 한국 소설과 달리, 몸서리쳐질 만큼 치밀하고 집요하게 반복되는 묘사를 통해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낸다. 그는 독자들이 그의 글을 읽음으로써 그들의 의식이 보다 자유로워지기를, 그들의 잠들어 있는 감각이 깨어나기를 바란다고,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밝힌다. 그런 감각의 갱신을 통해 우리는 삶의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엄정하고도 객관적인 태도와 시적 울림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하일지 문학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신적 고양을 경험하게 해 준다.
이 소설은 비단 한국의 독자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이미 영어로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곧 미국에서 소개될 예정이다. 세계의 독자들이, 더 나아가 미래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공을 초월한 공통 서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영원히 새로운 소설이다.
  • 지금 거기 없는 나라 - 우주피스 공화국 하일지, 반(半)소설
    괴물 | 2009년 06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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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이 소설은 반(半) 소설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소설은 시적이다. 그저 소설이겠거니 하고 읽어내려가던 중 내가 처음으로 '아, 하일지의 이 작품은 반시반소설이구나.'라고 확신을 하게 된 부분은 주인공 '...
    그러니까 이 소설은 반(半) 소설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소설은 시적이다. 그저 소설이겠거니 하고 읽어내려가던 중 내가 처음으로 '아, 하일지의 이 작품은 반시반소설이구나.'라고 확신을 하게 된 부분은 주인공 '할'이 젊은 요르기타의 집에서 함께 요르기타가 꺼낸 사진을 보는 장면에서였다.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세 번째 액자 속의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 속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요르기타와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런데 사진 속의 남자는 할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할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주피스 공화국이라는 제목이 독특했다. 처음에는 하일지가 만든 조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낱말에서는 환상의 냄새가 분명히 풍겼다. 대충 우주평화 공화국? 하핫. 뒷걸음질치다 맞춘 것이기는 하지만 소설 <우주피스 공화국>에서도 확실히 환상의 냄새가 났다. 소설을 다 읽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주피스 공화국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이다. 그 곳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있는 마을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할이 블라디미르와 동행했던, 작은 강을 건너서야 나오는 재기있고 유머러스한 예술가들의 마을이다. 우주피스 공화국은 4월 1일, 일년에 단 하루 독립하여 우주피스 공화국이 된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블라디미르가 말한 바로 그대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우주피스 공화국을 '존재'하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4월 1일 하루를 제하자면 1년에 364일을 우주피스 공화국은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 그리고 향수속에만 존재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혹은 슬픈 우주피스 공화국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추억에 대한 물리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주피스 공화국은 다분히 환상적이다.

    소설은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 할의 고향은 우주피스 공화국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게 된 만우절의 우주피스 공화국이 아닌, 언어도 있고, 국가도 있고 국기도 있고, 대통령도 있고 대통령궁도 있는, 그러나 전쟁 후 점령되었다가 최근에야 그 영토가 쪼그라들어 독립한, 몇몇의 사람들이 사소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실재했었던 어느 나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어느 정도 우주피스 공화국의 존재를 인정받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유품이 든  커다란 가방을 들고 우주피스 공화국을 찾아 낯선 나라에 도착한 할은 어디에서도 우주피스 공화국의 실재를 확인하지 못한다. 어디선가 문득 환영처럼, 환청처럼 우주피스 공화국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지만 주인공 할이 그림자를 붙잡으려 하면 연기처럼 흩어져버리기만 한다.

    소설을 읽는 중간에 든 생각이지만, 처음에 카프카가 떠올랐다. 이 소설은 카프카의 <성>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조금 있었다. 존재한다고 전해지지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성과 신성과 비슷한 어떤 힘, 처음의 목적과 본질을 상실하고 결국에는 안개와 같은 성에 도달하기 위해 시지포스처럼 나아가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비참한 실존. 그러나 물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나는 그런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카프카는 부조리하지만 하일지는 환상적이다. 우주피스 공화국은 부조리가 아닌 환상의 영역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우주피스 공화국의 사람들이 짊어진 것은 실존의 무게가 아니라 환상에 대응하는 본질로서의 삶, 삶의 궤도, 그 원심력의 무게이다. 할이 어디에나 가지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어린 시절 고국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비로소 중년이 되어 고국을 찾아 온 망명자에게 무겁고 커다란 가방이라는 것은 삶의 전체, 그리움과 추억의 전체, 향수와 감정의 전체이다. 할은 우주피스 공화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블라디미르의 앞을 제외한 어느 누구의 앞에서도 자신의 가방을 열지 않았다. 만일 할이 젊은 요르기타와 노파가 된 요르기타 앞에서 가방을 열었다면, 두 개의 동일한 세계가 부딪쳐 부서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환상, 혹은 삶이나 어떤 기원에 관한 여정은 그 순간 깨어지고 할은 조금 더 일찍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펼쳐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같은 이미지가 반복되기도 하는데, 거위를 든 농부, 벽시계를 짊어진 사람도 바로 그렇다. 그리고 농부의 거위와, 커다란 벽시계는 할의 커다란 가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듀티스키스로 가는 길에 눈덮인 언덕에서 본 벽시계를 진 사람은, 언뜻 기괴한 환상같지만 그 환상의 내용은 삶(운명)의 해방이다. 상승하는 삶, 그러므로 소멸하게 만드는 해방. 그리고 주인공 할이 그 해방을 맞이하는 방법은 권총자살이었다.

    워낙에 독특한 소설이기 때문에 짚어두고 싶은 내용이 꽤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하일지의 문체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할과 요르기타가 함께 사진을 볼 때 서술자는 '할은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런데 그 사진은 어젯 밤, 알비다스나 블라디미르에게 보여 준 사진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할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문장은 반복적으로 나온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문장은 이 외에도 여럿이다. 이와 같이 작가는 작품에서 적극적인 개입을 하는 대신에 단지 관찰자의 눈으로 서술한다. 이러한 서술 방법은 작가가 소설속에서도 말했듯이 인사이드 뷰의 노골적 기능성을 탐탁치 않게 여기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이러한 서술 방식의 시적인 효과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처음에 말했듯이 이 소설은 반시의 소설이다.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형식이 그렇고, 내용이 그렇다. 그리고 더불어 이와 같은 문체 역시 참 시적이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찜찜하고, 기괴하다고 하기에는 좀 슬픈 그런 시. 

    참으로 오랫만에 만난 하일지의 시는 많이 정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을 읽기 위해 7년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기다릴만 했다. 내 나름대로 책읽기를 하면서 작가의 의도나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완전히 왜곡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리 작가에게 사과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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