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지음
2009-12-08
12,000원 | 496쪽 | 210*145mm
종합평점 : 3.8 ( 6 명)
“도발적이고 발칙하며 감각적이고 치밀한” 작가 정이현이 펼쳐 보이는 새로운 미스터리!

여기, 한집에 사는 다섯 사람이 있다. 얼기설기 혈연으로 얽히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각각 개별자이자 단독자로 살아가는, 조그맣게 웅크린 그림자들.
2008년 2월, 서초구 방배동 서래마을의 한 빌라, 김상호와 진옥영 부부,
바이올린 영재인 초등학교 4학년짜리 딸 유지, 김상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혜성이 함께 살고 있다.
혜성의 친누나 은성은 학교 앞 원룸에 기거하며 가끔 집에 들른다.
김상호는 골프장으로, 진옥영은 친정으로, 혜성은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로 저마다 집을 비운 어느 일요일 오후, 서울 하늘에 가느다란 눈발이 날린다. 그리고 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몇 달 뒤, 초여름의 화창한 일요일 아침,
남한강유역 Y대교 교각 밑에서 발견된 알몸의 남자 변사체.
그는 누구이며, 이 가족과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

표류 사체의 성별은 남성이었다

시체가 발견된 것은 오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전 열시경이었다. 비둘깃빛 가운을 부대자루처럼 뒤집어쓴 성가대원들이 직사광선 내리쬐는 교회 뒤뜰에 줄지어 앉아 2부 예배 때 부를 찬송을 연습하는 시간, 지난밤 처음 만난 연인들이 숙취 때문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뜨겁고 어색한 두번째 섹스를 나누는 시간, 조기축구회 유니폼을 입은 이기적인 가장들이 넓적다리와 정강이 근육을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중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시간이었다.

(……)

일요일 오전 열시. 회사원은 늦잠을 자고 교인은 기도를 하고 연인은 사랑을 속삭이며 누군가는 축구공을 찬다. 막 몽정을 시작한 사내아이들이 강가를 이유 없이 배회하는 것도, 강바닥을 흘러다니던 시체가 홀연히 떠오르는 것도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표류 사체의 최초 발견자인 소년은 처음에 그것이 설마 사람일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지구대의 당직 경찰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인 소년과 그의 친구 둘은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Y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근처 아파트단지에 사는 아이들은 특별한 용건 없이도 종종 다리 밑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였다.
“저기 멀리서 뭔가 커다란 게 둥둥 떠가고 있었어요. 제 시력이 1.2, 1.0이거든요. 근데 딴 애들은 누가 쓰레기봉투 버린 거 같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랬어요. 그래도 저는 계속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집에 갔다 왔어요. 제가요, 원래 겁이 별로 없거든요.”

_정이현, <너는 모른다> 중에서

2002년, “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는 야릇한 선언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던, 삼십대 직장인 독신여성의 환상과 일상을 놀랍게도 간파해냈던 정이현의 미스터리라는 것만으로도,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다. 사건의 과정 혹은 숨겨진 행간들, 결국은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에 작가는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여유로운 일요일 오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서울이라는 도시, 그리고 5월의 한강변. 변사체가 떠오른다. 눈을 꼭 감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알몸의 남자는 오랫동안 물밑을 떠돌고 있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 말이 없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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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시작의 시작
2장 그녀의 편식 습관
3장 가본 적이 있는 창밖
4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존재하는 것
5장 웃지 않는 소녀
6장 단 하나의 이름
7장 허공을 걷다
8장 열세 개의 창이 달린 집
9장 바흐, 샤콘느 라단조
10장 나무상자 속의 고양이
11장 좁은 문
12장 찢어진 잎사귀 사이로
13장 PUZZLE 250X350
14장 악마의 트릴
15장 존재하지 않는 오후
16장 자기 앞의 생
17장 3월의 그림자
18장 새들이 난다
19장 가려진 부분들
20장 검은 봄
21장 두 세계
22장 저녁, 카니발
23장 바람은 등뒤에서
24장 신호등 없음
25장 그들의 선택
26장 일요일은 모른다
27장 머나먼 집
28장 끝의 시작
에필로그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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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의 의미.
    학진사랑 | 2009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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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의 메마른 두 발이 선명하게 그려진 듯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의 생사가 궁금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마지막 책장을 넘겨 봤다. 이로 인해 오히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 것이 힘에 겨워져...

    아이의 메마른 두 발이 선명하게 그려진 듯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의 생사가 궁금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마지막 책장을 넘겨 봤다. 이로 인해 오히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 것이 힘에 겨워져서 작가의 손에 의해 탄생되는 이야기의 결말을 왜 좀 더 행복하게 맺어주지 못했는가, 원망하는 마음도 생겼다. 물론 '희망'을 보여줬음을 알고 있다. 해체 되었던 가족이 아이로 인해 타인보다 못한 관계가 아닌 의지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 책은 한 남자의 죽음을 알리면서 시작된다. 아니, 한 아이의 실종으로 모든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처음 등장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가 나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건 아니었다. 유지의 실종으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던 한 가족에 대한 것이 철저하게 파헤쳐지면서 억울하게 죽었을지도 모를 남자에겐 관심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읽다 다시 한 번 등장한 이 남자의 시체를 보면서 어떤 기시감에 둔탁한 것으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혹여 내가 상상한 것이 맞는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작가가 바란 것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이름 없는 한 남자의 죽음을 다시 세상에 내놓음으로서 독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가슴 서늘한 공포심을 느끼길 바라지 않았을까. 아니, 조금의 동정심이라도 느껴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늘 현실을 도피하기만 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그래서 아이를 위해, '유지'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었던 한 남자의 의지가 김상호의 가족들에게 다시 희망을 주게 된다. 희망, 한 생명과 맞바꾸어졌기에 더 처연하게 다가온다.

     

    '달콤한 나의 도시', '오늘의 거짓말'을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은 좀 생경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앞서 읽었던 책들도 결코 가볍게 읽을 내용들은 아니었지만 '너는 모른다'는 가슴 한쪽이 뻐근할 정도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마지막 책장을 읽을 때까지 아이의 자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마음 졸이게 될 것이고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의문을 가지며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아닐 것이라, 며 유지의 실종이 계획적인 것이 아님을 우연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애써 머릿속을 비우려고 노력해왔다. 또 하나 밍과 유지, 진옥영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더 이상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이제 조금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으나 철저히 타인이었던 김상호, 진옥영, 유지, 은성, 혜성. 유지의 실종이라는 큰 사건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진정한 가족이 된다. 서로의 아픔을 숨긴 채 다가가지만 이제는 웃으며 대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문영광이라는 인물을 통해 가족들의 비밀 아닌 비밀이 모두 밝혀지지만 유지를 생각하면 모두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한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모습으로든 가족들의 곁에 있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상관 없다. 김상호가 돌아오면 많은 부분 달라질테지만 말이다.
  • 불편한 진실인가?
    똘레랑스 | 2010년 0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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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아는가? 당신은 모른다.나는 아는가?나는 모른다.소설을 읽으면서 한숨처럼 내뱉은 말은..이건 말도  안되는 거 아닌가? 라는 질문과,너는 모른다.는 원망의 소리였다.소설이라고는 하지만,너무 허구적...

    당신은 아는가?
    당신은 모른다.
    나는 아는가?
    나는 모른다.

    소설을 읽으면서 한숨처럼 내뱉은 말은..
    이건 말도  안되는 거 아닌가? 라는 질문과,너는 모른다.는 원망의 소리였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너무 허구적이다,너무 신파적이다..라는 말을 할 때마다
    환청처럼 들어야 했던 말은 '너는 모른다' 였다.
    그렇지,나는 모를지도 모르지
    이것 보다 더 심한 일도 얼마나 많이 벌어지겠는가? 거짓말 같은 일들 말이다.
    그러니,이 소설이 신파적이고 억지스럽다 해도,나는 참고 읽어 내야 했다.
    내가 모르는 당신들의 힘겨움이 있을테니까.

    나 역시 누군가를 미워해 본 기억이있다.
    그렇게 증오심으로 힘겨워 하던 나에게 누군가 그랬다. 자신은 상대방을 증오 할 수 없음이 그 마음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부메랑처럼 돌아 올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증오의 마음을 접었다고..
    김상호의 파렴치한(?) 직업과,그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김상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너는 모른다..너는 모른다..라는 말은 읽는 독자가 질문을 하고 싶을 때 마다,메아리로 들려왔다.

    정이현의 소설은 처음 읽었다.
    생각 보다 가독성이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재미있었다'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작가가 나에게 말한다.
    당신은 모른다고.

  • 인간에게 있어 가족이란 무엇인가?
    stella09 | 2010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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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지는 며칠 되었다. 그런데 문득 문득,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자꾸 리뷰 쓰기가 망설여졌다. 그래도 뭔가는 말해야 할 것도 같은데...    ...
     

    이 책을 읽는지는 며칠 되었다. 그런데 문득 문득,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자꾸 리뷰 쓰기가 망설여졌다. 그래도 뭔가는 말해야 할 것도 같은데... 


     


    우선, 작가가 외양에서 풍기는 이미지답게 꼼꼼하고, 촘촘하게 글을 썼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로선 작가의 <나의 달콤한 도시>를 드라마를 통해 보고,  책을 접하기는 이번이 처음인데 말미에 정말 열심히 썼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하지만 너무 여성적 감수성이 드러내서 일까? 잔잔한 감동은 있지만 굵직한 뭔가를 던져 주기엔 다소 미흡하지 않나 싶다. 물론 그렇다고 작품 자체를 즐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 사람은 기본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란 것이다. 아무리 가족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가족이란 나의 평안과 안락을 위해 있어주길 바라는 것이지 일정 부분 그것이 보장되면 사람은 여간해서 그 동굴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동굴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누구도 침범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으니 우리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집안에 살아도 서로 모르는 수 밖에.


     


    사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제시한 가족은 어찌보면 가장 흔한 중산층 가족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옥이 화교라는 점이 약간은 특이할 수도 있다할지 모르나 그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인물 설정이란 생각이 든다. 어차피 우리나라도 외국인과의 결혼이 잦아 졌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혼도 흔한 양상이다. 어떤 가족학자는 인간은 평생 두 번 이상의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오래 전에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이혼이 흔한 현실에서 개인의 정신적 성숙도는 이혼 현실을 못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속 은성이처럼 아빠를 싫어하고, 새 엄마를 싫어하며, 그들에게서 난 자신의 이복 동생도 싫어하지 않는가?


     


    사실 가족관계의 문제는 은성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등장인물 하나 같이 가족의 좋은 구성원이 될만한 자질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 유지가 유괴되지 않았다면 이들의 문제는 잔잔한 수면 밑에 잠식되어 있다가 언제 수면 위로 솟아 오를지 모르는 불안한 고요 속에 있다. 너무도 잔잔하고, 너무도 불안하여 오히려 일탈을 꿈꾸지 않았던가? 유지의 유괴로 인해 그를 찾는 과정에서 그들의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모습에서 그렇게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그나마 유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가 건드려졌지 왠만해서 유괴 같은 큰 사건은 누구에게나 잘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을 보면 이런 가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문제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왜? 사람은 동굴을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즉 유지처럼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원래 이래야 하는가 보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렇게 불안 하지만 그것이 어느 만큼 보장되고 확보가 되면 여간해서 그 동물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지는 친구도 안 사귀고 자신이 얼마만한 자질이 있고 없고 간에 그냥 바이올린 연주라는 그 동굴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가? 그리고 기껏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나오지만 유괴나 당하고.  그러므로 유지는 태어나면서 가족 구성원으로서 진정한 관계 맺기가 쉽지 않고 사회성이 낮은인물이 된다.  오늘 날의 가족도 그렇지 않는가? 그저 나는 누군가의 아내고, 남편이며, 딸이고, 아들이란 명분만 있을 뿐 그에 따른 인간적 도리는 없다. 왜 그런가를 생각하면 기본적인 의식주에 별 불만이 없으며 살아가는 것에 별 불편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 위에 물질만능만을 추구하니 인간적인 도리라는 게 물질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난 유괴되었던 유지가 집에 돌아 오고(물론 그 결말이 만족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을 통해 그동안 없던 가족간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생겨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가족이란 이제 혈연으로만 연결되지 않는다. 어려울 때 같이 염려 해 주고, 걱정해 주는 것이 가족이다. 그저 단순히 내 불안한 동굴을 지켜주기 위해 가족이란 기본 단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미스터리 형식을 취했던 만큼 밝게 해피앤딩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유지는 돌아왔지만 여전히 불안과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끝을 맺는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 사람은 왜 사람과 닿고 싶어할까
    깊은슬픔 | 2010년 0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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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하건대, 나는 한 번도 가족을 원한 적이 없다. 어느 날 문득 세상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더니 세상에 나를 내놓은 부모가 가만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고, 내 팔다리가 다 자라기도 전에...

    고백하건대, 나는 한 번도 가족을 원한 적이 없다. 어느 날 문득 세상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더니 세상에 나를 내놓은 부모가 가만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고, 내 팔다리가 다 자라기도 전에 내 의지와는 별도로 네 살 터울의 남동생이 생겨났다. 그 뿐만 아니다. 꼭 닮은 유전자와는 별도로 전혀 닮지 않은 성격이나 취향을 보유한 넷은 그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그 후로도 쭉 아니, 죽을 때까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될 것이다. 포기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 관계, 가족. 그건 누구도 동의나 항의같은 걸 할 수 없는 성질의 암묵적 규칙 같은 것이었다. 좀 다른 형태의 가족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내가 알기로 세상의 모든 가족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범위 내에서 형성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물은 아담 뿐이었다. 아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브가 창조되기 전까지는.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을 반반씩 닮은 새 생명을 잉태하기 전까지는. 시작이 그러하다보니 인간은 특히 비밀스러운 순간일 수록 늘 혼자가 되는 건지도 모른다. 가족이든 애인이든 어떤 관계로 규정하든지 간에 그건 세상을 정의하고 싶은 부류의 건방진 착각이다. 가족이라서 더 아는 것도 없고, 애인이라서 더 아는 것도 없다. 그게 누구든 어떤 관계에 있든 타인이 아는 건 고작 당사자의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나는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건방진 생각인가. 누가 누군가를 온전히 알 수 있으리란 기대는. 유지네 가족은 겉으로는 그저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지만 가족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한 유지의 실종 후 기다렸다는 듯 끔찍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서로 아무 것도 모른다. 유지의 사라짐 후 뒤늦게 서로를 파헤쳐보지만 이제 그들은 드러내기보다 감추기에 더 급급하다. 진실을 캐내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제3자다. 문득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현기증을 느낀다. 내가 사라지면 내 가족은 과연 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만약 내 가족 중 하나가 사라지면 과연 나는 허둥대지 않고 단번에 찾을 수 있을까?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래도록 생각했지만 역시 자신이 없다. 


    가족이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관계의 다른 종류와 다른 점이라면 아마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오래도록 가족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있는 것이란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용서할 수 있는 원동력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사실은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다 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가 가족이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화창한 5월의 일요일 오전에 서울의 한 강바닥에서 떠오른 남자 시체도 아니고, 가족들이 모두 제 인생을 사는 동안 잠시 밀려났던 유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도 아니다. 아버지 김상호가 양심을 팔아 돈을 산 것도, 은성이 남자에게 버림 받을 때마다 자해소동을 벌이는 것도, 혜성이 의대에 다니는 척 하면서 매번 용돈을 타가는 것도, 새엄마 진옥영이 친정에 간다고 해놓고 타이페이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도 엄연히 말하면 문제는 아니다. 그건 그냥 서로를 안식처로 인식하지 못하는 비극을 가장한 어느 가족 구성원들의 숨겨져야 할 진실일 뿐이다. 그 사실은 마치 유지가 김상호의 딸이든 밍의 딸이든 진옥영의 뱃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에는 변함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지네 가족의 문제는 방문만 열면 알 수 있는 것들 또한 모르고 지나쳤다는 데서 기인한다. 서로를 좀 더 믿을 수 있었다면 그들의 고통은 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족간의 소통부재는 곧 사회의 소통부재가 된다. 가족은 작은 사회집단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나 국가의 대부분의 문제해결은 결국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회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게 핏줄로 얽혔든 지연으로 얽혔든 간에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얻는 개인의 만족감은 평균 기대치를 훨씬 웃돈다. 한 번 생각해보자. 세상에 던져진 하나의 개체로서 힘든 일이 생긴 순간, 가족으로부터 받았던 위로와 사랑의 힘을.   


    나는 섣불리 유지네 가족을 비판하거나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저 우리라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한 인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에서부터 안까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세세히 알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알든 모르든 가족이라는 존재는 신의 질투에 의해 그렇게 간단하게 해체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할 뿐이다. 없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향수의 향이 그렇고 기억의 조각이 그런 것처럼, 연락하지 않는 것과 연락처를 모르는 것은 다른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는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좋을 것이 생각보다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윤리에 어긋나는 떳떳치 못한 직업 때문에 딸의 실종을 경찰에 신고조차 못하는 아버지, 어린 딸을 두고 옛 연인을 만나러 간 엄마, 최소한의 예의와 관심만 지키며 한 지붕 아래 사는 아들, 그것조차 못 견뎌 혼자 살면서 남자들과의 관계에 모든 존재를 거는 딸. 이들의 모든 비밀을 가장 먼저 눈치 채는 사람이 아버지가 고용한 사립탐정원이라는 것이 아마 이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까. 재정상태, 가족 내 문제, 부부사이까지 모두 까발려야만 얻을 수 있는 진실이라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주 예전에 읽은 소설에는 누군가의 삶을 가장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단 한가지는 그가 내놓는 쓰레기 봉투라고 했었다. 어차피 열어볼 것이 아니므로 가장하고 숨길 필요가 없는 것. 사실 가족이란 존재는 가족의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 받기 싫으면서도 끊임없이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고 싶은 것.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타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아닌 것. 단지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칼을 드는 것. 어쩌면 내가 또 다른 사람을 다 알 수도 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은 늘 사람과 닿고 싶어한다. 어느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노래했다. 어쩌면 사람은 사람과 완전히 맞닿거나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를 잘 안다고 믿는 가족 구성원들조차도 동그라미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은 유일하게 서로 개인사를 궁금해 해도 괜찮은 사람들이다. 또 유일하게, 방문만 열면 개인사를 알 수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어떤 사건에 대해 서로 죽을만큼 걱정하고 애태워도 무의미하지 않은 관계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가족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안식처가 되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또 따로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가질 수 없고,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버릴 수 없으며,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다 알 수도 있다고 믿는다. 친구도 애인도 헤어지면 남이 된다. 가족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 중에 가장 신비로운 영역이다. 핏줄과 정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가족이라는 이름은 소통이 되지 않아도 가족이고, 소통하지 않아도 가족이며, 따로 떨어져 살아도 가족이다. 때로 필요에 따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다른 관계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제 가족 안에서 가족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내 행복을 위해 가족을 희생하기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나를 던질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혼자였던 개인이 가족을 통해 소통하고 위로받으며 스스로 또는 타인을 치유할 때 세상은 좀 더 살만해 질 것이다. 그러면 유지가 블로그의 음악 포스팅을 통해 만난 단 하나의 대화상대를 찾아 집을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유지네 가족은 결코 하나로 뭉칠 어떤 계기나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유지의 위험천만한 가출을 이용해 가족의 단합과 소통을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화창한 5월의 일요일 오전에 떠오른 알몸 남자의 시체는 과연 누구일까. 그 역시 누군가의 그리움이고, 상처이고, 가족일 것이다. 가족, 애인, 친구 같은 산뜻한 정의를 벗어나서도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과연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안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안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나를 보여주는 것과 타인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쉬운 일일까? 문득 지금 내 가족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너는 모른다 한국소설, 정이현
    치카 | 2010년 0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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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창한 5월,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대부분, 어느정도의 여유가 없더라도 주말의 하루쯤은 가족나들이를 가게 되는 그런 5월의 일요일 오전, 모두가 한가로이 자신들만의 일을 하면서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한들 내가...
    화창한 5월,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대부분, 어느정도의 여유가 없더라도 주말의 하루쯤은 가족나들이를 가게 되는 그런 5월의 일요일 오전, 모두가 한가로이 자신들만의 일을 하면서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한들 내가 관여해야 하는 일은 아니야 라는 심정으로 보내게 되는 어느날, 한강변에 부패되기 시작한 알몸의 남자시체가 떠오른다. 놀라운 일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닌것이 되어버린 일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다.

    한강변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이 떠오른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 역시 지금의 시대에는 특별하다거나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기에 소설과 현실을 적절히 넘나들며 우리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가의 '문학'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혼 후 재혼을 한 가정, 그 안에서 새로운 부모와 가족관계에 적응을 하지 못해 상처입는 아이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현실적인 선택으로 결혼을 하여 겉도는 부부, 각자가 상처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하여 더 고립되어버리는 가족...
    그런 가족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국제결혼이 많이 이뤄지고있지만, 여전히 우리사회에는 인종차별이 횡포를 부리고 있으며 그보다 더 심한 일들도 일어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뭔가 전혀 융합되지 않고, 끈끈한 가족애로 뭉쳐지기는 커녕 서로가 서로를 외면하고 때로는 적대시하기까지 하는 이들 가족은 그런데도 여전히 '가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에게 오로지 돈을 받아내기 위해 휴학을 망설이는 혜성, 자해와 자살소동을 벌이며 한 사람에게 애정과 신뢰를 쏟아내지 못하는 은성, 십년이 넘도록 헤어지지 애인과 헤어지지 못하는 그들의 계모 옥영, 화교인 옥영의 화교인 애인인 밍,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 상호,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옥영의 딸 유지.
    유지의 행방불명과 상호의 의심쩍은 직업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되어 이어져가면서 가족이 해체되는 수순을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애초에 이들 가족에게는 '가족의 유대감'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고 굳이 이들을 가족으로 남겨둬야 하는 이유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끝끝내 가족으로 남는다. 이들의 마음과 가족으로 남기 위한 노력과 애씀이 어떠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물론 짐작이야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누가 뭐라 해도 결단코 바뀌지 않는 것을 진실이라고 부를까? 알 수 없었다. 세상은 진실의 외피를 둘러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아이가 짐작하는 건 그뿐이었다. 타인을 겨냥한 악의는 어쩌면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 풍선 같았다.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쪼그라들지 않았다. 뻥 터져버리는 순간을 기다리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163)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현대인의 소외를 나타내고 있는 말이라 한다면, 지금 이시대의 삶에서 가족이란 어쩌면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 또한 서로를 가장 모르는 사이일수도 있으며 각자의 고독을 알 수 없을 수도 있음을 '너는 모른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족'이란 서로의 이해관계나 설득을 통해 유대관계를 이어나가는 관계가 아니며 뻥 터져버리는 순간, 모든것이 다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유대감으로 '가족'임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르지.

  • 너는 모른다
    WHEELER | 2010년 0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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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너는 모른다]는 그 제목부터 기발하다. 우리가 뭘 모른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반대로 또 아는 것은 뭔가 싶기도 하다. 도대체 이 책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 하나다. 바로 '가...


     이 책 [너는 모른다]는 그 제목부터 기발하다. 우리가 뭘 모른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반대로 또 아는 것은 뭔가 싶기도 하다. 도대체 이 책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 하나다. 바로 '가족'... 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을 꼽는다고 한다면 '가족'일 것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해왔고, 또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함께 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또 모르기도 한...


     


     지금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는 뭘까? 지금과 같은 핵가족 시대에는 '가족'의 의미가 많이 흐려지기는 했지만, 대가족시대를 경험했던 이들에게 '가족'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거친 사회에서 나를 보호해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믿어주는 든든한 그런 사람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가족'이란 말은 점점 멀게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가족'이란 뭘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주 교과서적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내가 좀전에 이야기했듯이...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가 정말 그럴까? 삶이라는 무게가 더이상은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워질 때, 그때 그 짐을 나누어 질 사람들... 아무도 없다고, 이 세상엔 이제 나 혼자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때... 돌아갈 그곳은 오랫동안 ‘가족’이었다.


     


     그들은 내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믿어줄 사람들이고 또 나를 감싸줄 사람들이었다. 결국에는 내가 돌아갈 곳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타인보다 더 나를 더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들, 세상 밖 누구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역시 ‘가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가족'이 없는 게 나을까?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바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한 가족을 통해,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말이다. 2008년 2월, 서초구 방배동 서래마을의 한 빌라... 김상호와 진옥영 부부, 바이올린 영재인 열한 살짜리 딸 유지, 김상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혜성이 함께 살고 있다. 혜성의 친누나 은성은 학교 앞 원룸에 기거하며 가끔 집에 들른다.


     


     김상호는 골프장으로, 진옥영은 친정으로, 혜성은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로 저마다 집을 비운 어느 일요일 오후, 서울 하늘에 가느다란 눈발이 날린다. 그리고 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딸 '유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딸 '유지'의 실종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신경숙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와 그 형식적인 면에서 닮아 있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엄마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엄마에 대한 그들의 추억이 얼기설기 엮이며 그동안 잊어버렸던 엄마의 존재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 물론 이 책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대신 이 책에서 보여지는 것은 '가족'이란 이름이 아닌 개개인의 이름으로 저마다 살아왔던 삶의 단면들이 보여지며 그 이면에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여러가지 사실들이 하나하나 등장해 서로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철저하게 타인일 수 밖에 없었던 그들...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야했을까?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너는 모른다'는 이 책 속 인물들 개개인에 대한 작가의 말이기도 하며, 우리 자신들에 대한 타인의... 아니 가족들의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것일까? 나에 대해... 그리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족들에 대해... 내용은 간단하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 처음에 가볍게 읽기 시작했던 이 책은 페이지를 넘겨 갈수록 나 자신을 심각하게 옭아맸고, 이 책이 이야기하고 있었던 여러가지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은 인간이다. 가족이 아닌 인간... 인간 본연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가족...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원'이다. 동그라미... 울타리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이란 이름의 동그라미인 것이다. 개개인이란 점으로 이루어진...


     


     결국 이 책은 가족으로 시작해서 개인을 이야기하고, 다시 가족으로 돌아온다. 하나의 원이 점이 되기도 하지만 점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원을 만들듯이...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맴돌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계란이든 닭이든... 아니 다른 무엇이 먼저이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 모두의 생존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이 책 속 몇몇 부분에 있어서 마무리를 짓지 않고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시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사라진 '유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찌되었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어찌보면 미완의 결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완벽이나 완성이 중요한 것일까? 이 작품은 시종일관 지속적으로 독자들의 머리 속으로 끊임없는 사유의 즐거움을 불어넣는다. 다소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일 수도 있음에도 끝까지 이 책을 읽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 듯 싶다.  

  • 장르의 통속성 비껴간 새로운 글읽기의 즐거움, <너는 모른다> 정이현, 너는모른다
    빨강머리앤 | 2010년 0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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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저자 정이현이라는 명성에 기대어 (문학동네)를 선택하지 않았다. 독서를 선택한 데에는 장르적 호기심 때문이었다. 소통하지 못하는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의 전말이 궁금했고, 이로 인해 생기는 그들 사이의 또 ...

    <달콤한 나의 도시>의 저자 정이현이라는 명성에 기대어 <너는 모른다>(문학동네)를 선택하지 않았다. 독서를 선택한 데에는 장르적 호기심 때문이었다. 소통하지 못하는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의 전말이 궁금했고, 이로 인해 생기는 그들 사이의 또 다른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감정의 파장이 그려내는 새로운 그림이 보고팠다. 요컨대 탈 연애소설을 썼다는 혹은 한국 칙릿 소설계에 깊이를 더해준 정이현 작가의 건조하지만 말랑말랑한 문체가 가족극의 형식을 빌린 사회파미스터리 안에서 그 모습을 어떻게 달리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너는 모른다>는 우리의 적당한 기대를 가뿐히 무시해버린다. 무척이나 도전적으로 정이현은 장르의 ‘탈(脫)’을 시도했다. 외피는 동시대 가족의 단상을 날카롭게 세운 펜촉으로 그린 추리 소설이지만 무게중심을 조금만 어느 한쪽으로 옮기기만 해도 이야기는 전혀 다른 맨살을 보여주고 있다.


    <너는 모른다>는 두 가지 관점으로 동시에 접근해야만 그나마 작가가 무심하게 심어 놓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이 (작가가 의도한) 의미를 가지며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것이 클리셰적인 장르적 쾌감과 완성도 사이에서 나름의 재미의 기준점을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 성공적인 말 걸기가 됐는지는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다. 다만 이것이 소설 읽는 내내 작가의 진심이고 성장의 고통이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장르를 비껴가다.




    모든 것에 충만한 생명감이 충전되고 있는 5월, 알몸으로 발견된 남성의 익사체. 소설의 인트로는 시간이 늦장을 부리는 시기인 5월의 한 일요일을 묘사하는데서 출반한다. 하품 나올 정도로 따뜻하고 무료한 일요일의 풍경 안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시체는 까슬거리는 돌기의 혓바늘처럼 글 속에서 이질적인 위화감을 드러낸다.




    - 표류사체의 성별은 남성이었다. 남자는 전신 알몸 상태였다. 물에서 발견된 사체가 대게 그렇듯 시반은 보이지 않았고 시신의 외피는 한껏 팽대해져 있었다. 체내 황화수소와 삼투압작용에 의한 것이었다. 시랍화가 진행된 피부는 회백색으로 변했고 비누칠을 한 것처럼 미끌미끌했다. 손바닥과  발바닥은 비 맞은 습자지처럼 쪼글쪼글했으며, 코와 입에서는 붉은 혈성액이 침처럼 연신 흘러나왔다. 사내가 오랫동안 물 밑을 떠돌았음을 알려주는 여러 정황증거들이었다. 눈을 꼭 감고 있어서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p.9




    불친절한 인트로에서 정이현의 변화가 단면적으로 보인다. 그는 무심한 눈길 같은 문장으로 써내려가고 있지만 읽는 이는 계속해서 그 사신을 흘깃흘깃 훔쳐본다. 이것은 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과는 확연히 다른 색깔의 ‘호기심’의 뿌리일 것이다. 사실 단숨에 사건의 한 가운데(시체의 발견)로 독자를 이끄는 이 같은 방법은 미스터리 소설에서 곧잘 만날 볼 수 있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도입부분이다.


    다음 장에서는 가족이지만 가족이라 호명할 수 없는 김상호 가족을 등장시켜 익사체로 발견된 남성과 이 가족이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데 그의 서술 방식은 독특하다. 각자 비밀을 간직한 김상호를 포함한 다섯 명의 가족에 대한 묘사는 느슨하다. 결코 가까이 다가서서 그들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 그의 문장은 한 옥타브씩 사건의 전말을 높여가는 미스터리 서술 방식을 비껴나간다. 이로 말미암아 첫 장부터 강렬한 파열음을 내면서 등장한 익사체와 김상호 가족의 연결고리를 찾으려하는 독자들의 맹렬한 의지를 풀죽게 만든다. 장르 소설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긴장감은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으려는 정이현의 서술방식은 확실히 일반적인 장르 소설의 방식과는 그 궤를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단편적으로 연결된 사건이 종국에 와서는 하나의 커다란 그림의 퍼즐이 되는 방식도 그는 취하지 않고 있다. <너는 모른다>의 사건 진행방식은 차라리 국어낭독처럼 지분지분 진행된다.


    막내딸 유지가 실종되는 2월 24일 일요일, 아빠 김상호, 유지의 친엄마이자 은성과 혜성의 새엄마인 진옥영은 서로의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집을 비운다. 의대생인 혜성 역시도 마찬가지다. 혜성은 오후 2시까지 들어오겠다는 말을 했으면서도 저녁나절이 되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누이 은성은 2층 구조인 그 고급빌라에서 아예 살고 있지도 않다. 가족이기에 같이 살지만 철저하게 분리된 각자의 공간에서 숨어서 아슬아슬하게 가족으로 연결된 이 가족의 하루 동안의 외출은 막내딸 유지의 실종과 어떤 연관성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나열된다. 유지의 실종과 관련해 이 가족의 외출에는 작가가 적어놓지 않은 트릭이 숨어있지 않을까 찾아보지만 문영광의 등장으로 그런 의심조차 점차 시들해진다.




    유지를 찾기 위해 김상호가 고용한 사건해결사 문영광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라면 탐정의 위치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이현은 문영광을 통해 유지의 실종과는 즉물적인 관계가 없는 이 가족 개개인의 비밀을 풀어내는데, 정확히 말해 읽는 이가 짐작하는데 할애한다.


    유지의 실종이라는 꼭짓점으로 모아지지 않는 가족의 비밀들. 이야기는 점차 각자 원문이 따로 있는 파편들로 흩어진다. 이것은 엄밀히 따져 장르의 속성을 배반하는 처사다. 다분히 고의적인 작가의 장르 비껴나기는 가족이라는 연결고리를 흐릿하게 하면서 등장인물 개개인의 역사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 흐릿한 연결선을 따라 유지의 부재가 드러낸 ‘가족’을 더듬더듬 찾아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만 남는다. 여기서 가족에게는 없는 음악적 재능의 소유자 유지의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소설에서 유지가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여기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정이현은 숨고 싶은 순간에는 바이올린을 켜는 상상을 하는 유지의 심리 묘사로 이 가족의 불협화음을 들려준다. 유지의 실종으로 소리를 낼 기회를 잃은 바이올린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사실 유지의 부재는 장르의 속성을 역이용한 작가의 맥거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안에서 진실은 인물들의 관계를 연결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진심은 이 관계에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흐릿해지는 관계 속에서 도드라지는 ‘가족’




    추리 소설이라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는 <너는 모른다>는 관계의 이야기다. 통속적인 가족드라마의 해체와 조립,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일지 모른다.




    화교 진옥영은 김상호의 아내이면서도 내연의 남자 밍을 곁에 둠으로써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려 한다. 혜성은 새엄마에 대한 거부감을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정을 맺은 동료 또는 방패막으로 인정하고 있다. 은성은 혜성과 달리 핏줄로 연결된 유지를 무시하면서까지 가족이길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고픈 퇴행적인 애정관으로 존재감을 부여받으려한다. 선명하게 절단선이 그려져 있는 이 가족 안에서 유지는 포기를 습득해버린다. 이런 것들을 인지하고 흐릿하게 연결돼 있는 가족의 연결선을 집중해서 독해를 하다보면 유지의 실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온다. 유지의 부재는 그들이 증명해주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픈 '외출'에 가까울 것이다.




    유지의 실종으로 김상호를 비롯한 가족들은 극도의 불안과 상실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심리적 압박감은 딸이, 여동생이 사라진데서 오는 걱정과 절망이 뒤섞인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그런 고결한 감정이 아니다. 적어도 유지의 실종을 처음으로 인지한 순간에는 말이다. 김상호와 진옥영, 혜성과 은성은 보면서도 알면서도 못 본체한 서로의 비밀이 까발려질까봐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냉정한 가족의 이면을 정이현은 무심한 듯 차례차례 적어 내린다. 장르에 천착하지 않고 읽어 내려가니 장르의 특성인 잔혹함이 드러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분명 읽는 이의 의표를 찌르는 충격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면서도 정이현은 그 이면 깊숙이 흐릿하게 연결된 가족의 점멸선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점멸선을 굵은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주는 인물이 바로 문영광과 밍일 것이다. 사실 정이현의 덤덤한 문체 속에서 김상호의 가족은 더 이상 자력으로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없음을 고하고 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일 수 없는 문명광과 밍은 이 가족의 언저리에서 그들이 가족일 수밖에 없는 사실들을 일깨워준다.


    김상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선택한 자신의 직업에 얽힌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 이 가족의 가시적인 공중부양을 선언하는 일임을 알기에 협조자로서 문명광을 필요로 한다. 은성에게 문영광은 유지의 실종을 빌미삼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위로해주는 존재로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처럼 김상호의 가족에게 문영광은, 유지의 실종을 해결해줌으로써 서로의 비밀이 탄로 나지 않고도 허울뿐인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몸을 숨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안심시키는 안정제 같은 역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르의 속성을 의식적으로 피해가는 작가는 문영광에게 그들의 비밀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역할은 줬어도 이들을 단단히 묶이게 하는 고리로의 역할은 주지 않았다. 대신 결코 가족이 될 수 없는 밍을 통해 다른 방향을 보면 살던 김상호의 가족에게 유지라는 꼭짓점을 제시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문영광과 밍을 작가가 각각 어떤 무게감으로 그리고 있는 가다. 가족의 비밀을 알 리 없는 독자 입장에서도 김상호의 가족처럼 문영광은 독자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밖에는 존재다. 그러나 그의 퇴장은 초반의 묵직한 존재감에 비하면 턱없이 단출하다. 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극 안에서 사라진다. 이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장르의 속성을 비껴나가는 작가의 의도이면서 인위적인 것으로 연결될 수 없는 가족의 고유성을 증명하고픈 작가의 순수한 의지다.




    작가는 한 번도 온전한 아버지로의 김상호를 그리고 있지 않다. '아버지'로 불리거나 불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이들은 '가족의 탄생'을 위한 밑바탕의 재료로만 기능하고 있다. 만약 소설이 여기서 끝났다면 이것은 냉소적인 현대 사회의 가족상을 그리는, 우리가 익히 봐왔던 그저 그런 통속적인 가족소설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정이현은 아버지가 부재한 김상호 가족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그제야 온전한 아버지의 자리를 만들고 있다. 김상호 가족에게서 모습을 감춘 밍도 마찬가지다. 밍은 진옥영과의 관계에서보다 서로 대면조차 하지 않은 김상호와의 관계 속에서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 알몸으로 발견된 익사체의 남성이 밍이라고 독자가 짐작하더라도 그의 실종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김상호의 위치를 선명하게 해줄 뿐이다.




    <너는 모른다>가 새로운 가족소설, 장르소설의 전범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장르소설에는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문체로 클리셰적인 인물 역할을 분해하고 가족을 해체한 정이현은 소녀의 실종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전혀 새로운 가족드라마를 완성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절단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사회적인 소수 단위의 영원성을 장르의 통석성을 이용해 역설적으로 풀어낸 새로운 접근방식에 새삼 글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했음을 부정도 못 하겠다.

  • [너는 모른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시작, 가족.
    린넷 | 2010년 0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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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손에 들고 한참을 제목으로 정해진 듯한 한 마디의 말을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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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는모른다]가족이란 무엇인가...
    행운바다 | 2011년 0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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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갑자기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고 서로를 마냥 보듬어주기만 하는 가족은 없다. 가족 구성원들은 분열하고 싸우고,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느라 몹시 바쁘다.)이 가족은 불행...

    (어느 날 갑자기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고 서로를 마냥 보듬어주기만 하는 가족은 없다. 가족 구성원들은 분열하고 싸우고,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느라 몹시 바쁘다.)

    이 가족은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기 전, 이미 분열되어 있었다. 가족에게 철저히 비밀로 해야하는 떳떳하지 못한 일은 하는 아버지, 그는 가족과의 교감 따윈 너무 바빠 안중에도 없는듯 가족 안에서도 외톨이 이다. 재혼으로 만난 무뚝뚝한 남자와 만족하지 못하는 결혼생활을 하는 엄마는 과거의 남자에게 온통 마음이 쏠려있다. 살림은 하지만 오롯이 가족을 위한 마음의 자리는 없다.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을 맞게 된 큰 딸은 그로 인한 상처로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처량한 반항아가 되었다. 사랑을 갈망하지만 진정 사랑은 할 줄 모르는 철부지. 둘째인 아들은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이며 순응하는듯 말썽없이 자라지만 마음 속에선 탈선의 큰 불이 자라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통제키 어려운 상황에선 방화를 저지르며 분노를 표출한다. 이제 이 집안의 이복동생이자 막내. 웃지도 울지도 않는 무감정의 이 아이는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이 갑갑한 울타리에서 벗어날 날을.


    불행은 동시다발로 터진다. 위태로운 상황에선 작은 일 조차 손쓸 겨를이 없기에 금새 큰 일로 번지게 된다. 불행은 자신이 들어앉을 자리를 잘도 찾아가니 놀랄뿐이다.

    이 소설은 그렇다. 화목하지 못한 가족에게 빈틈을 보고 스멀스멀 기어들어온 불행이 가족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내용이다. 위기는 생각지 못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고 했던가. 결국 가족은 가족의 의미에 한발 다가가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끼는 가장 무서운 진리!
    모든 것은 가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사회라는 이름과 연결되는 단어들의 온상은 바로 가정이다.

    건강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 이루게 되는 이 사회 역시 건강할 확률이 높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상황에선, 절망적인 미래가 보일뿐이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가 생겨 낳고 키우고....이제 그런 단계에서 보다 진화해야 할것 같다. 나의 가정이 속하게 될 이 사회를 생각해 보다 준비된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책은 그런 생각들을 확고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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