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지음
2010-01-28
10,000원 | 252쪽 | 210*145mm
종합평점 : 4.3 ( 2 명)

“깨어지지 않는 게 사랑이야.
어떤 균열이든 두 팔로 끌어안고 지속하는 그것이, 사랑의 일이야.”
전경린은, “독을 독으로 푸는” 소설가다. 그의 매혹적인 문장들은, 언제나 그 치명적인 독성으로 인해 독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더 벼리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미 더없이 날카로운 그의 펜 끝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거둘 수 없는 증오를, 화해되지 못하는 관계를, 부서지고 조각난 삶을, 그로 인해 온통 흔들리는 영혼을, 후벼판다. 그리고, 역시 그 날 선 펜 끝으로, 그 모든 것들을 다시, 온전히 끌어안는다.

전작 『엄마의 집』에서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냈던 전경린은 새 장편 『풀밭 위의 식사』에서 다시, ‘사랑’을 말한다. 사랑의 감정에 대해, 사랑하는 이들의 현재와 과거에 대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그보다 더 아름답고도 정확하게 그려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마음 한켠을 날렵하게 베어내 얇게 벼린 그 조각을 들이미는 듯한 그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어느새 자신의 마음자리까지 작가에게 내어주고 말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과 독자들의 마음까지를 온통 깨어지기 쉬운 유리의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작가는, 그러나, 말한다.
“더 많이, 깊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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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밀로 섬의 비너스는 두 팔이 없어요
2장 더는 견딜 수 없어
3장 마리안느의 일기
4장 헤이, 우리 소풍 가요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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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적어도 내 진실은 감당하며 살고 싶어요
    깊은슬픔 | 2010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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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웠다. 더 외로워졌다. 요즘 느끼는 기분을 단지 외로움이란 단어에 가둘 수 있다면 차라리 나았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랐다. 눈앞에 닥친 시간들이 벅찼고, 누군가와 나의 기대에 숨찼고, 할 수만 있...

    외로웠다. 더 외로워졌다. 요즘 느끼는 기분을 단지 외로움이란 단어에 가둘 수 있다면 차라리 나았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랐다. 눈앞에 닥친 시간들이 벅찼고, 누군가와 나의 기대에 숨찼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멈춰버리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을 견디는 것 외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절실히 믿으며 버티는 나날이었다. 특별한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려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나가떨어지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상처 입은 나비처럼 나도 모르게 자꾸만 몸을 사렸다. 나이 탓인가. 마음이 도전과 안주 사이를 널뛰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결정된 것 없는 20대의 끝줄기가 이토록 처절하게 외로울 줄 미처 몰랐다. 이대로 서른이 올까봐 두려웠다. 놓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깜빡 든 낮잠처럼 놓쳐버린 시간은 누릴 틈도 없이 쉽게만 멀어져갔다. 그런데 누경을 만나면서, 더더욱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에 나는 몸서리쳤다. 그녀는 나와 닮았으며 또한 달랐다. 적어도 그녀는 버티고 있었다. 숨으려고만 한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어느 누구보다 내 삶에 자신이 있었다. 일도, 사랑도, 삶도, 꿈도 내 것이면 다를 거라 믿었다. 지나친 긍정과 막연한 자신감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가족이란 이름의 틈바구니에서 삶이라는 고통과 마주하며 사랑이란 감정에 온 마음을 내맡기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다가올 내 30대도 누경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두려웠다. 자꾸만 다가오는 기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꼬꼬마였던 아홉 살부터 열여섯 소녀시절도 모자라, 심지어 청춘이 모조리 지나갈 때까지 온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이름 모를 끌림을 어쩌지 못해 기다림과 어긋남을 반복하는 서강주와 그녀의 관계 때문에 호흡이 가빴다. 지옥과 천국을 넘나드는 기분. 딱 그것만치 어지러웠다. 도대체 사람이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에 대해 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했다. 막 스물다섯. 그때 나도 그랬다. 딱히 계획이랄 것도 없이 기대만 충만했던 어느 겨울, 한 달 간의 유럽여행 끝자락에서 마음을 흔드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건 단지 그곳이 이국적인 풍경을 가진 예술의 도시였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후로 쭉 파리는 다시 가지 못할 꿈의 도시인 것만 같다. 그를 만난 겨울은 봉인된 봉투 속 편지처럼 비밀스러운 곳에 갇혀서도 여전히 숨을 쉰다. 열 시간의 물질적 거리와 여덟 시간의 시차만이 그와 나를 가르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다만, 3년 전 내가 과연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것이 이상할 뿐. 누경의 서강주를 향한 마음이 처음부터 사랑은 아니었듯, 시간과 공기만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관계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굳이 이해하거나 받아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누경과 서강주는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견뎌야 할 것이다. 그게 인생이다.
     

    누경에게 한없이 다가가려는 또 다른 남자 기현은 왜 하필 누경이었을까. 누경은 왜 기현이 아니라 인서였을까.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으로 만든 사랑의 묘약이 정말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삶은, 세상은, 사랑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정석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삶이란 것은 원래 유리와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투명한데, 그래서 절대로 흐릿해지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당하기 힘든 우리의 마음이 자꾸만 유리와 스테인드글라스를 흐리게 하는지도. 누경이 서강주를, 기현이 누경을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숙명이기 때문이지, 누경의 헝겊인형 때문이거나 기현이 들은 점쟁이의 말 때문이 아니다. 우린 누구나 본능적으로 나를 간직해둘 곳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져지지 않는 사람을 만지려 애쓰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없고, 다시 돌아나가지도 못할 것이다. 원래 그런 거니까. 그래서 모두에게 삶이 이토록 벅찬 것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상처를 있는 그대로, 추억도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있던 그 자리에 돌려놓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그래서 이 긴긴 소설을 읽으며 내가 생각한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세 노르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안고 일상적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럴 것이다. 라는 말. 나에게는 물론, 파리에 있는 나의 아저씨에게도, 누경과 기현, 누경의 꿈속 아버지에게도, 여전히 알쏭달쏭해서 잘 모르겠는 서강주에게도, 더불어 삶에 지치고 사랑에 미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정말 우린 모두 자신의 진실은 감당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억울해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주문처럼 이 말을 되뇐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 노르말.
     

  •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직언, <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빨강머리앤 | 2010년 0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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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얼마나 허한 것인지 누구나 한번쯤 뼈저리게 느낄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사랑하는 건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해, 다른 날, 다른 시각에 태어나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쌓아 올린 두 ‘개인...

    사랑이 얼마나 허한 것인지 누구나 한번쯤 뼈저리게 느낄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사랑하는 건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해, 다른 날, 다른 시각에 태어나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쌓아 올린 두 ‘개인’이 만나 서로의 빈틈을 매워주며 ‘우리’가 되는 것. 그게 사랑이라 믿었다. 숨을 삼켰다 뱉으면서 입술을 오므리고 피는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둥글고 따스한 온기가 묻어나는 어감, “우리”


    그러나 개인이 포개져 우리가 되는 것은 찰나이다. 사실 그 찰나도 개인의 고유성에 기인해 만들어낸 개인만의 착각일지 모른다.




    전경린의 소설 <풀밭 위의 식사>도 그 ‘사랑의 헛함’을 통렬하게 파헤친 소설이라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인간이 왜 자신이 쌓아올린 견고한 상에 갇힌 채 고독한 개인으로 밖에 살 수 없는가를, 작가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싹싹 긁어내 증명해낸 이야기라 생각했다.


    특히나,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을 빗댄 소설의 제목과 표지를 보면서, 나의 위태로운 삶과 고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위무해주는 소설일 것이라 내심 기대했다. 그렇기에 아름다운 소설이라 믿었다. 작은 방에 웅크린 채 짐승처럼 울부짖고만 있는 나를 보듬어주는 이야기일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나와 똑같은 누군가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마주하게 만듦으로써,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시선을 피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잔혹한’ 소설이었다. 전경린은 나를 닮은 주인공 누경을 통해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 자기 존재성과 삶의 진실을 아름답지만 잔혹하기 그지없는 물기어린 문장으로 이어냈다.




    누경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남자 기현을 ‘낯선’이란 단어로 표현한다. 같은 곳에 있지만 전혀 다른 시간 속을 걷고 있는 누경의 그 창백한 분위기는, 세상과 공명하지 않기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낯설게만 바라본다. 누경은 혼자만의 세상에 갇힌 ‘개인’으로 비쳤다.


    갑자기 누경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기가 ‘무서워졌다.’ 누경이 느끼는 세상의 질감이, 소설 밖 내가 느끼는 그것과 똑같다면 나는 누경을 통해 내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습게도 인간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맞닥뜨리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누구에게도 털어내지 못하는 나의 치부와 콤플렉스를 나와 똑같은 사람은, 똑같다는 이유만으로 내 정체를 속속들이 알아채기 때문이다. 난 그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혼자인 게 무섭고 싫어 ‘우리’를 갈망하면서도 나와 동질인 인간은 ‘우리’ 안에 포함시키려 하지 않는다. 이런 자기보호적 방어본능이 사랑의 실패와 고통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아둔한 우리는 매번 잊어버린다. 견고한 성에 둘러싸인 개인과 개인이 만나 ‘우리’ 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달라서다. 그런데도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같은 동질의 인간을 만나면 겁부터 내며 밀쳐 내거나 숨어버리기 바쁘다.




    나에게 누경은 그런 존재로 읽혔다. 책장을 넘길수록 깨져버린 유리병 같은 존재로 그려지는 누경은 지금의 나와 흡사했다. 아니 나였다. 무엇 하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지금의 나와, 누경을 보며 팔이 없는 비너스를 떠올리는 기현이 바라본 누경은, 위태로워 보이는 만큼이나 나약함이라는 공통점으로 겹쳐진다.




    스스로도 사랑이라 정의내리지 못한 서경주와의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불륜관계를 끝내고 누경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갔다. 이 시간은 서경주가 선물한 유리병이 깨진 그 순간부터, 깨진 유리병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누경이 만들어낸 시간이다. 누경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깨진 초록빛 유리병을 버리지 않는 게 다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술집에서 우연히 누경을 만나고 그녀를 마음에 담은 기현이 느꼈던, 그리고 누경이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가는 혹은 영유하는 시간이라 말한 그 ‘다른 시간’은, 16살에 홀로 풀밭에 누운 후부터 자신을 조금도 사랑하지 못하게 된 누경의 과거 편린들이다. 그것은 명백히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그저 지금을 유령처럼 부유하는 누경의 애처로운 변명일 뿐이었다.




    사랑의 이면을 들춰낸 작품성 있는 연애소설 쯤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책을 읽기 시작한 나는 작가가 써 내린 단어와 문장들 사이로 유령 같던 누경의 명암이 또렷해질수록 다음 장으로 책장을 넘기는 게 무섭기보다 ‘두려워졌다.’ 무서움이나 두려움이나 거기서 거기인 감정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감정은 명백히 다른 것이다.


    전경린의 부드럽고 달콤한 문장에는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나 놀랄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강력한 파워가 내재되어 있다. 이 힘은 자기연민으로 만들어진 내 비겁함의 옷마저 벗겨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있는 것, 난 그것이 무서웠다. 두려움은 알몸이 된 나를 마주하는 것에 기인하는 감정이다. 누경이라 불리는 여성은 나를 고스란히 비쳐내는 거울 같아서 지금의 나를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끔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 나 또한 누경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격렬한 욕망으로 불타오르던 내 사랑이 너무나 쉽고 차갑게 식어버리고 깨지는 것을 우두커니 목도한 뒤,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회사의 폐업으로 인한 실직의 아픔을 핑계 삼아, 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는 길을 선택했다. 누경이 깨진 유리병을 버리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작은 방에 몸을 숨기듯 웅크리고 앉아 상처를 방치한 채, 그저 숨만 쉬는 시간을 걷고 있었다. 다른 시간을 걷고 있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고집스레 ‘지금’을 마주하려 들지 않았다. 눈에 쌍심지를 켜며 취업원서를 써도 모자를 판인 백수 주제에, 누경처럼 난 과거의 유령이 되어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들었다.




    전경린은 잔혹하다.


    이렇듯 읽는 이의 고통에 찬 자기고백을 끝끝내 끄집어내게 할 만큼 그의 소설은 잔혹해졌다. 그는 누경을 통해 사랑의 찬란함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의 헛함과 우리가 되지 못한 개인의 고독을 증명하고 위로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지금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직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문장에는 창조자의 오만함이 배어있지 않다. 잔혹할지언정 그의 글은, 과거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누경, 혹은 내가 오직 제 힘으로만 그곳에서 빠져나와 지금을 살라고 간절히 바라는, 삶의 응원가였다.


    지금을 산다는 게 설령 ‘삶에 속거나 삶을 속일 시간’일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현실에 발을 딛고 살 수 있다면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다는 식의 희망을 그는 자신의 소설에 희미하게 얹어놓았다. 그래서 그의 글은 잔혹한데도 눈물이 스며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 가시지 않는 여운 때문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찾아보았다. 그림 속 여자는 알몸인 채로 풀밭 위에 앉아, 그림 밖 세상을 모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녀의 웃음이 세상을 조롱하는 비웃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찾아본 그림 속 그녀의 웃음은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로 보인다.


    지금, 그림 속 여자가 누경을 거쳐 나로 투영된다. 자기연민으로 만들어진 옷을 벗어버린 알몸의 나를 바라본다. 오랫동안 방치했더니 여기저기 아물지 않은 상처투성이다. 다행이도 생각보다 흉해 보이진 않는다. 사람이란 동물은, 우리가 될 수 없는 개인인 채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 상처를 스스로 핥아주면 살아야 한다고 했던가?


    이제 나에게도 그렇게 해야 할 시간이 평화롭게 찾아온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마저 잊어버린 나에게 그녀의 소설은 가장 잔혹하고 아름다운 직언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법을 다시금 찾게 해줬다. 전경린 작가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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