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지음
2010-04-06
12,000원 | 408쪽 | 188*128mm (B6)
종합평점 : 4.8 ( 3 명)
2010년 박범신의 신작 장편소설 『은교』

“이 소설로 나는 내 안의 욕망이라는 게 여전히 눈물겹게 불타고 있음을 알았다!” (박범신)
“연애소설이 예술가소설로 육박한 사례라고 하자. 2010년의 박범신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좋다!” (신형철)

*
2010년 1월 8일 소설가 박범신은 그의 네이버 개인 블로그에 방 하나를 만들었다. 애초의 문패는 ‘살인당나귀’, 그러했다. 인터넷 연재소설의 포문을 열었던 『촐라체』 이후 많은 작가들이 현재까지 다양한 포털 사이트에서 소설 연재를 펴나가고 있다. 그의 용기 있는 첫발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작금의 상황은 불가했을 터, 2010년 그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바로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어디에도 발표한 적 없고, 단 한 번도 독자들에게 선보인 적 없는 미발표 장편소설의 연재를 시작한 것.
정해진 어떠한 형식도 분량도 없었다. 개입하는 출판사도 편집자도 없었다. 시간 또한 예고될 리 없었다. 그저 그는 자신이 쓰고 싶을 때 써서 올리고 싶은 만큼만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독자와의 직거래,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가장 순정한 글쓰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번 소설에 임하는 제 자신에게 ‘미친 듯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막상 시작을 하니 그 질주를 스스로 제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마치 “인기 작가이자 청년 작가였던 내 젊은 날”을 회복한 것처럼.
한 달 반 만에 소설은 완성되었다. 끝내고 보니 제목은 『은교』로 바뀌어 있었다. 연재를 시작한지 석 달, 최종회의 챕터는 44회. 환갑을 훌쩍 넘긴 소설가는 그러나 그 미친 듯한 질주 끝에도 차마 마음속에서는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내 말들이 말처럼 질주하는 대로 따라가자 했고 지금도 그 폭풍의 질주가 멈춰지지 않고 있어. 지금도 이 얘기를 한 권 더 쓰라면 금방 쓸 것 같아. 사건은 없고 아직도 너무나 많은 말들이 남아 있어. 이게 정말 사랑의 소설인지는 모르겠어. 존재론적인 소설이고 예술가 소설이지 싶어, 나는.”
-『풋,』 2010년 봄호에서

평생 원고지를 고집했던 작가가 처음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쓴 소설 『은교』. 『은교』는 과연 어떤 소설일까.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를 살짝 엿보면 다음과 같다.

*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받던 이적요가 죽은 지 일 년이 되었다. Q변호사는 이적요의 유언대로 그가 남긴 노트를 공개하기로 한다. 그러나 막상 노트를 읽고 나자 공개를 망설인다. 노트에는 이적요가 열일곱 소녀인 한은교를 사랑했으며, 제자였던 베스트셀러 『심장』의 작가 서지우를 죽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이 담겨 있었던 것. 또한 『심장』을 비롯한 서지우의 작품은 전부 이적요가 썼다는 엄청난 사실까지!
이적요기념관 설립이 한창인 지금, 이 노트가 공개된다면 문단에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이 빤하다. 노트를 공개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 Q변호사는 은교를 만나고, 놀랍게도 서지우 역시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듣는다. 은교에게서 서지우의 기록이 담긴 디스켓을 받은 Q변호사는,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디스켓을 통해 그들에게서 벌어졌던 일들을 알게 된다.
이적요는 자신의 늙음과 대비되는 은교의 젊음을 보며 관능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자신을 “할아부지”라고 부르며, 유리창을 뽀드득 소리 나게 닦는 은교의 발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청춘’을 실감하기도 했다. 한편, 서지우는 은교를 바라보는 이적요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은교에 대한 집착이 커져갔다. 정에 넘치던 사제지간이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는 은교를 둘러싸고 조금씩 긴장이 흐르기 시작하고, 열등감과 질투, 모욕이 뒤섞인 채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그리고 서지우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이적요는 조금씩 생명력을 잃어갔다. 이적요는, 정말 서지우를 살해했던 걸까. 이적요는, 정말 한은교를 사랑했던 걸까.

*
소설『은교』의 키포인트는 다름 아닌 ‘갈망’에 있다. 예서 ‘갈망’이란 무엇인가. 이는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소설 속 주인공 이적요를 핑계 대고 자신의 욕망을 투영했다는 작가에게 ‘갈망’이란 단순히 열일곱 어린 여자애를 탐하기 위하는 데 쓰이는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 갈망은 이룰 수 없는 것, 특히나 사랑의 갈망은 이미 절망을 안고 있다는 데서 보다 근원적인 어떤 감정이 아닌가.

“지난 십여 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낱말은 ‘갈망(渴望)’이었다.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이 소설 『은교』를 나는 혼잣말로 ‘갈망의 삼부작(三部作)’이라고 부른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情恨)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감히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엉켜 있는 사랑이 실타래를 이루고 있다고 해서 이를 단순히 연애소설에 국한시킬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자란 무엇인가. 여자란 또 무엇인가. 젊음이란 무엇인가. 늙음이란 또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 소설은 또 무엇인가. 욕망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남자들에게 여자란 나이가 없는 것이듯, 여자에게 또한 남자란 나이가 없는 것이듯, 작가가 계속해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던져진 질문에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몸을 빌려 살아가고 살아내고 죽어가고 죽음으로 작가가 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그가 고유하게 받고 있는 에너지와 욕망이 있어. 그걸 어떻게 해서든 사용해야 한다고. 그런데 나는 글로 풀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쓰니까 그래도 내 욕망을 공깃돌 갖고 놀 듯 핸들링하지 않냐. 나는 말이다, 소설이 없었으면 무슨 나쁜 짓을 했을지 모를 사람이야. 그것만은 분명해.” -2010년 『풋,』 봄호에서

2010년 작가 박범신은 여전히 쓰고 있다. 그럼으로 그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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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시인이 마지막 남긴 노트 이적요 시인
Q변호사 1
시인의 노트 창槍
시인의 노트 쌍꺼풀
Q변호사 2
시인의 노트 등롱燈籠
시인의 노트 심장
Q변호사 3
시인의 노트 나의 처녀-은교에게
시인의 노트 육체-풀과 같은
시인의 노트 의심
Q변호사 4
서지우의 일기 류머티즘
시인의 노트 우단 토끼
시인의 노트 노랑머리
Q변호사 5
서지우의 일기 불안
시인의 노트 침묵
시인의 노트 범죄
서지우의 일기 수상한 평화
시인의 노트 분노
서지우의 일기 반역
시인의 노트 선고
서지우의 일기 헌화가
시인의 노트 꿈, 호텔 캘리포니아
시인의 노트 집행
Q변호사 6
시인의 노트 은교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
에필로그 - 시인이 마지막 남긴 노트 Q변호사
작가의 말 - 돌아온 내 젊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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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능적이다...
    보슬비 | 2010년 05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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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그냥 '은교'라는 이름이 맑아 보였고, 책 표지 디자인이 어디인지 모르게 끌려서 선택하게 된 책이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표지를 펼쳐 보이고서야 표지 디자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깨닫게 되는...














    이 책.  



    그냥 '은교'라는 이름이 맑아 보였고, 책 표지 디자인이 어디인지 모르게 끌려서 선택하게 된 책이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표지를 펼쳐 보이고서야 표지 디자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깨닫게 되는 순간에도
    여전히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새삼 관능적이기 가지 하네요.



    [책커버를 펼치면 숨어 있는 그림을 보실수 있습니다. 원래 책 커버에 띠까지 있는거 좀 번거롭게 느꼈었는데,
    이 책은 책띠가 꼭 있어야할것 같습니다. ] 



    [겉커버만 살짝 빼서 펼쳐보았습니다.]

    열일곱살 소녀와 소녀의 나이에 다섯배나 되는 일흔살의 노인. 


    사실 이 책의 소재를 알았더라면 이 책을 읽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자극적인것 같기도 하고,
    사회적인 윤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관계라 별로 읽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면에서 전혀 내용을
    알지 못하게 읽것이 제게 행운이었습니다. (그로인해 이 책과 작가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죠.)


    지금은 그저 안타까움과 애닮음만 제 가슴에 가득 채워버렸습니다. 


    주인공이 시인이라서인지, 책속의 글들은 무척 감수성이 풍부했던것 같아요. 상황에 맞는 시들과 시인답게
    표현되어 있는 글들... 읽는내내 은교에 대한 이적요 시인의 열망과 애정이 그대로 전해지는것 같았거든요. 


    여행후 돌아와서 피곤했었는데, 밤을 세며 읽을 정도로 재미있고, 매혹적인 책이었습니다. 그 동안
    '촐라체'라는 독특한 책제목은 봤었지만, '박범신'이라는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할것 같네요.

  • 사랑, 그 소멸과 불멸에 관하여
    stella09 | 2010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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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를 알아?  종이로 만든 책이 아직도 건재한가 보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작가 박범신 선생께서 언제부턴가 당신의 불로그에 '살인 당나귀'란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하신 것을.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을...
    네가 <은교>를 알아? 

    종이로 만든 책이 아직도 건재한가 보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작가 박범신 선생께서 언제부턴가 당신의 불로그에 '살인 당나귀'란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하신 것을.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을 뿐 이게 뭐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한다한다는 작가들이 그렇듯 일단 자기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그것을 책으로 내는 것이 보편화되어가고 있으니 이 작품도 곧 책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꼭 봐야한다면 책으로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연재물을 꼼꼼히 챙겨 볼만큼 부지런 하지도 않으며 컴퓨터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도 그다지 편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종이로 만든 책은 언제나 건재해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원래의 제목 '살인 당나귀'가 아닌 <은교>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난 예전의 제목 보다 지금의 제목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읽게 되었다.  


    솔직히 박범신 작가는(더 정확히 말하면 작가의 작품은) 그동안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적잖이 많이 들어왔던 이름이지만 여간해서 선생의 작품은 나의 손에 들려지기를 한사코 거부해 왔었다. 왜 그랬을까? 건방지게도 사춘기 그 어린 마음에 선생은 그냥 사랑 이야기나 쓰는 통속 작가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 시절 문학 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나도 한때는 글 써서 돈 버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지망생이라면 문학을 대하는 편견없이 진지하게 남의 작품을 대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은가? 난 그래서 지금까지 그 죄를 속하느라 작가가 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한때 동문수학했던 사람들을 모처럼 만났다. 그때는 내가 <은교>를 읽고 있었던 중이라 입이 간질거려 도저히 이것을 말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야, 늬들 <은교> 꼭 읽어라. 그거 읽으면 우리 싸부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떻게 확장 발전시켜 나가는지 알 수 있다. 그러자 같이 동문 중의 하나가 거 내용이 뭡니까? 한다. 노인이 소녀를 사랑하는 내용이다. 그러자 그는 콧방귀끼듯 그런 사람 파고다 공원가면 많습니다. 그러면서 냉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무식한 넘. 탑골 공원이지 파고다 공원이 뭐냐? 그래. 넌 그러고 살다가 죽어라. 니가 <은교>를 알아?' 좀 아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세상을 달관한 건지 아니면 열등감과 우월감을 교차시키는 건지 매사 아는 척,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하는 주의라 만나도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작가가 될 사람이라면 사회 현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진지하게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문학에 대해 말했으니 말이다. 그래놓고 작가가 되겠다니 혀가 절로 차졌다.(참고로 그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단다.)  


    그런데 돌아켜 보면 그나 나나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도 <은교>를 몰랐을 때 그 보다 나은 태도를 보였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솔직히 이 작품의 프롤로그를 읽을 때까지도 탑골 공원의 어느 변태 노인에 관한 연상을 쉬 지워버리지 못했으니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 보단 인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자세가 더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랑 그 야성과 이성에 관하여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거였다. 즉 이적요 시인의 또 다른 분신이 결국 서지우 작가라는 것이다. 이적요 시인에게도 서지우 같은 동물적 본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지우를 향한 불타는 증오는 기실 자신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으로 커져갔고 결국 파멸로 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적요 시인이 은교에게 보이는 태도나 행동은 이성적이고 문화적인 측면(페미니즘적인 측면까지도 포함한)까지 포용하고 있는 반면, 서지우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동물적이며 권위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사람 하나에 다 들어있을진대 그것을 인정하고 융합하고 화해시키기 보다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두 개의 측면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이렇게 대립하고 융화하면서 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적요는 왜 자신 안의 동물적 본능을 죽여 가면서까지 은교를 사랑했던 걸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가 인용했던 대로,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으며(파스칼) 분별없는 광기(셰익스피어)일 뿐인가?


    이적요 VS 서지우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사랑의 방식이 서지우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서지우가 이적요의 적대자로서 이적요와 대립하면 대립할수록 더 옳게 증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서지우는 이적요를 힘도 없으면서 음욕으로만 가득찬 노인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당위를 위해 은교에게 설득하려 하려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은교의 눈엔 오히려 이적요가 더 옳고 건강하며 그에 비해 서지우가 오히려 변태적이며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남자에 대한 평가는 같은 남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하는 것이 더 옳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지우는 은교의 평가를 무효화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다 덫에 걸리고 만다. 또한 서지우가 결정적인 잘못은 인간의 정욕과 사랑을 한 가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육체가 노화되면 정력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사랑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깨닫기엔 서지우는 아직도 미숙했다.  노인에게 정욕이 없을 거라는 건 이 이야기의 방식으로 보자면 덮어 씌우기의 원죄일 뿐이다. 서지우도 그렇게 죽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이적요처럼 노인이 될 것인데 그땐 자신을 어떤 식으로 증명할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에 대한 황금률 중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고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거기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 전제가 되지 않으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것은 도통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이적요 노인은 피그말리온의 원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고 그 조각상과 실제 사랑을 나누다가 죽어버리고만 피그말리온. 그것이 오늘 날 교육 이론이나 정신분석학 이론에 적용이 되곤 하지만 그 보단 이 사랑의 공식을 정의할 때 쓰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은교는 모든 사람이 다 사랑할 수 있는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그늘진 평범한 아이로 보인다. 다만 그녀가 가진 특수한 무엇이 이적요의 뇌관을 건드렸을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사랑한 건 은교 자신이라기 보단 은교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더 사랑한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지 않은가? 과학적으로 보자면 짧게는 3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을 넘지 못한다는데(이런 정의는 또 얼마나 삭막한가?) 그것의 유무는 대상 그 자체에 있기 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콩깍지에 있고 보면 말이다. 또한 콩깍지 하나의 무게는 과학적으로 얼마나 나갈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무한대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얼마나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얼마나 큰 사람으로 만드는가?  


    그런데 그런 말도 있다. 정말 너무 사랑하면 대상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 즉 말하자면 이적요가 은교를 갖지 않은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랬을 때 은교는 비로소 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보호해 줬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보내고 끌어 당기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서지우에 의해 짓밟혔다. 내가 가진 꽃이 꺾여지고 짓밟혔다면 누군들 분노하지 않고 복수하고 싶지 않을까? 더구나 이적요도 남자일진데 말이다. 여자 하나로 인해 어제까지 아군이 오늘은 적군이 되어 싸우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 은교가 없었더라면 이적요와 서지우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알 속에서 잘 살았겠지? 결국 인간의 평화는 어떤 상황 또 누군가에 의해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메멘토 모리, 소멸 또는 불멸            


    가끔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다. 보통은 사랑 때문에 살 생각을 하지 죽을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사랑하면서 티격태격하는 것도 다 살아있는 증거고 사랑하며 살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죽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불행한 일이지만 드물게 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말이다.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일려고 작심했을 때 그는 저 말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서지우를 죽이고 자신이 어떻게 될지? 은교는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실행했고 서지우는 죽었다. 물론 나중에 드러난 건 꼭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인 건 아니지만 결국 그의 증오가 서지우를 죽게 만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자신도 죽어갔다. 결국 죽음을 생각한다면 그렇게까지 자신의 뜻을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서지우의 죽음은 이적요의 육체성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소멸되지만 그의 사랑과 원죄는 불멸로 남은 것이다. 때로 사랑은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생기를 주지만 죄책감이 그를 사로잡으면 사랑이 옆에 있어도 그것이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적요는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했다는 것일 것이다. 예술가로서 그만한 사랑을 했다면 글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끝내 울어버린 소설 '은교'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 책을 읽다 울어버리고 만 것이다. 내내 작가가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떻게 확장시켜 나갈 것인가? 그것만을 내심 열심히 쫓다 결국 한방  맞았다. 서지우는 자기 눈에 서린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사고로 죽었지만, 나는 죽어가는 이적요가 은교를 그리워 하는 그 장면에서 시야가 흐려져 계속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나에겐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나의 독서란 무지한 지성을 깨우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읽어왔을 뿐인데 그래서 책이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것에 쉬 동의하지 못했는데 그런 생각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책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생의 자작시로 보이는 '빈들'이란 시를 대했을 때다. 


    사랑을 믿지 않으면 누가 아침 이슬에게 경배하겠는가


    고꾸라지고 베이고 허물어져도 청노루 눈빛


    그 아침빛이 너를 통과해와 세계의 구석방


    내 안에 꽃초롱으로 둥지를 튼다 새는 날마다


    저녁으로 떠나가고 나는 아직 모른다


    저기 자갈투성이 해안선 끝나는 곳에


    어떤 아우성들이 또 물레를 돌리고 앉아 있는지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중에서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난 갑자기 오늘 날 왜 변태 노인이 그렇게도 문제가 되는 걸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몸은 늙어가는데 그에 따라 정신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불균형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사랑의 능력을 섹스의 능력과 동일시에서 비록 몸은 늙었지만 정력은 조금도 소진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 하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재대로된 사랑은 없거나 사랑은 다 변태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고 무엇이 진정한 사랑이고 성숙한 사랑인지 그것을 말하려 했던 적이 있었는가? 플라토닉. 사랑은 성교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적요는 말해주는 듯도 하다. 문제는 사랑을 허리 아랫쪽으로만 몰고 갔던 이 사회가 더 변태적인 것이 아닌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본 은교       


    책의 말미를 향할수록 내가 만약 Q 변호사였다면 과연 은교에게 이적요의 노트를 읽어 보라고 허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첫번 째 드는 생각은 나는 은교가 그 노트를 읽지 않게되길 바랬다. 왜냐하면 은교가 이적요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다른 사랑을 못하고 평생 갇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지만 우리 시대 사랑이란 다 고만고만한 물물교환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발화시킨 사랑이 어디 흔하냐 말이다. 나를 위해 그가 그렇게 해 줬다면 어찌 다른 상대와의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은교는 그 한 사랑만 보기엔 너무 젊다. 필시 그 노트는 은교에겐 판도라의 상자일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나중에 드는 생각은 우리의 세대가 사랑을 믿을 수 있는 세대라고 보는가? 하지만 은교만큼은 진짜 사랑이 있었다는 걸 알지 않겠는가? 사랑도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줄 안다고, 그렇다면 그것으로 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은교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그녀 몫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적요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학대했다기 보단 육체에 갇히는 것이 싫어 그 나름의 발화 의식으로 자신을 혹사시켰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이 시대의 사랑을 통렬히 비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적요와 박범신       

    소설은 어느 만큼의 진실과 허구를 잘 융합시킨 문화상품이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정말 17세의 소녀와 사랑을 하고 이 작품을 썼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선생의 첫 작품을 읽은 것에 불과하지만 많은 부분 이적요에게서 선생의 데자뷰를 느꼈다. 특히 이적요를 빌어 우리나라 문단을 비판한 것과 그리고 이적요를 시인으로 등장시킬 만큼 시를 좋아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적요의 대쪽 같은 캐릭터도 어느만큼은 선생의 이미지는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또한
    그만큼 문체는 시적이면서도 탐미적이다.  


    사족으로 조금 과장을 해서 말한다면, 이 책을 읽고나니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몇 안 되는 소설들이 하찮게 느껴졌고 그나마 썼던 나의 글들이 허접하다 못해 쓰레기 같이 느껴져 한숨만 더욱 깊어졌다.   

          


          


     

  • ...<은교>처럼 웃고 <은교>처럼 울기...
    한사람 | 2010년 09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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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밤을 고민하다가 편지형식을 빌립니다. 지난 봄날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은 독자들에게 작업을 거는 것이며 나도 사랑받고 싶다는 당신의 솔직함을 만난 적 있습니다. 당신은 를 미친 듯이 썼고 우리는 미친 듯이...
    며칠 밤을 고민하다가 편지형식을 빌립니다. 지난 봄날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은 독자들에게 작업을 거는 것이며 나도 사랑받고 싶다는 당신의 솔직함을 만난 적 있습니다. 당신은 <은교>를 미친 듯이 썼고 우리는 미친 듯이 읽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에서 많은 부분 당신과 나를 그리고 우리를 엿보았습니다. 아직은 늙지 않았다 생각하는 여성독자인 내가 육체적으로 완벽하게 주인공과 동화되기는 힘들었으나, 그 너머 당신의 고통과도 동일하게 지각하긴 어려웠으나 이제 부족한 나의 언어로 당신의 사랑에 대한 갈망에 고개숙인 위로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인 은교는 관념적인 존재라 했습니다. 독자인 제가 <은교>의 마음으로 시인의 노트와 소설가의 일기를 제 가슴속에 태워버릴 것을 허락해 주실 수 있나요? <은교>처럼 웃고, <은교>처럼 울어도 이해해주실 수 있나요?


    은교여요.
    저는 요즘 소설을 쓰고 있어요. 물론 저는 시를 썼었고, 시를 쓰고 싶었어요. 당신처럼 말이죠. 저는 모든 시인은 '진실'을 노래하지만 모든 소설가는 '거짓'을 이야기한다고 믿었어요. 물론 시인이 소설가보다 항상 진실하다고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어요. 전 그냥 시인과 시인이 만나고 소설가와 소설가가 헤어지는 것보다는 시인과 소설가가 만나서 헤어지는 것이 더 재미있는 소설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며칠 전엔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었어요. 전 그 소설을 덮고는 처음으로 당신을 원망했어요. 소설 속 험버트와 롤리타처럼 사랑하고 배신했을지라도 저는 열 네 살짜리 여자아이, 롤리타가 되지 못한 제 열일곱을 오열하며 후회했어요. 그들의 사랑이 결코 아름답지 않았지만 당신이었다면 당신에게서 였다면, 격정적이고 광적인 사랑만큼이나 죽음보다 더한 상처까지도 기꺼이 받아 낼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억속의 당신을 책임지는 일, 어쩌면 앞으로 다른 남자와는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당신은 누구보다 완벽했고 또 나를 완벽하게 만들어줄 유일한 남자였으니까요.

    당신이 서지우를 처음 만났을 때의 서지우 처럼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당신에게 묻고 싶었어요. 당신은 서지우가 취직도 잘되는 무기재료학의 길을 버리고 밥먹고 살기 어려운 문학의 길로 들어선데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가 인생을 잘못선택했을 뿐이라고요. 하지만 천재성을 가진 문인으로서 서지우에게 소질과 능력에 대해 처음부터 당신이 느낀대로 알려주고 낙타같은 운명을 살아가지 말 것을 끝까지 충고할 수는 없으셨나요? 그가 평생 동안 주인이 주입해준 생각대로 짐을 지고 걸어갈 것을 예감했으면서도 당신은 서지우의 주인으로서만 개인적인 편리를 누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요? 당신은 비겁하게도 서지우를 대리인삼아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던지기도 했어요. 나는 서지우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서지우가 당신을 계속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는 당신에게 너무나 화가 났어요.

    당신은 세상과 사람을 가지고 노는 재능이 남달리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지식인 사회의 구조를 비웃듯 적요라는 필명을 짓는 여우같은 전략을 세웠고, 곧은 정신과 높은 품격으로 대변되는 당신의 이미지 역시 오랜 세월 끈기있게 획책한 당신의 전략이었어요. 당신은 그에게 좋은 시를 가르칠 생각도 있었지만, 감수성과 재능이 부족한 서지우였지만, 그가 당신을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는 것만큼은 거절하지 않았어요. 당신의 서지우에 대한 사랑은 그를 사랑하는 당신의 울타리 내에서만 허락된 것이었어요. 당신은 그런 서지우의 가당치도 않을 능력을 알면서도 왜 그에게서 상처 받을 수밖에 없었나요. 그보다 더 젊었던 저에게 조차 당신은 서지우보다 훨씬 더 매력있는 남자였었는데 말이죠. 그건 아마도 그렇게 초라하게 늙어가는 당신 자신에 대한 미움이자 분노였을까요? 객관적으로 병이 없어도 늘 몸이 안 좋다고 느끼는 사람과 병이 있어도 주관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둘 중 누가 더 스스로 행복한 삶이라 생각할까요. 당신의 열일곱을 내가 알 수 없었듯이 늙는 것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라 절망한 당신이 어찌 원망스럽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는 오랜 세월 당신이 오직 죽음으로서만 완벽을 갈구한 서리같은 고매함에 목놓아 울고 싶진 않았어요.

    당신은 어느날 층계를 올라가다 발목을 접질린 내 발목의 옴씬 들어간 부분을 꼭꼭 손가락으로 눌러주었어요. 기억하시나요? 나는 그날 온몸의 피가 허리를 타고 머리까지 감전되는소스라친 경험을 했어요. 어릴 적 발목이 간지럼 타던 때와는 확실히 다른 전혀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첫발을 들여 놓은 것이었어요. 그것은 열일곱의 여름에 새롭게 발견된 제 성감대였고 당신은 신비롭게도 그것을 발견해 낸 내 육체의 콜럼버스였어요. 당신이 나의 손을 미치도록 사랑했듯이 나 역시 하얀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만년필을 집어든 당신의 관능적인 손가락을 미치도록 그리워 할 거여요.

    그래서 난 당신을 기억 속에서 보다 지금 이 현실 밖에서 더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의 내 사랑은 당신에게 김밥을 싸들고 가 어깨시원한 안마를 해드리고 당신이 숨쉬는 공간에서 휘파람을 불며 유리창 청소를 하는 가녀린 젊은 신부가 아닌 당신의 문학을 뼛속까지 읽어내고 당신의 세월을 핏물처럼 빨아들여 비로소 당신의 고요한 외로움을 감싸 안는 사랑이니까요. 내 가슴속에 당신은 당신이 영원히 잠든 암굴을 파버렸으니까요. 이제 내가 당신의 영혼을 품는 초록빛 '손보자기'가 되어 드릴 차례니까요. 이 찬란한 오월의 눈부심과 펄펄 끓는 한여름의 태양을 지나 눈물보다 시린 가을바람을 밟고 가슴을 도리는 칼날을 견디어 나의 육체와 그 모든 성숙을 당신의 암굴 속에 다시 피우는 애닯은 꽃이 되고 싶어요. 사랑했어야 했고 사랑받았어야 했을 당신에게 나의 사계절을 두손 모아 담습니다. 이젠, 나의 봄날이 가고 한바퀴 돌아 또 봄날이 와도 당신을 잃지 않아요.

    여름이 지나도 타지 않을 그리움으로 또 뵙기를.


    당신을 처음 만난 이른 여름,
    당신의 영원한 신부
    은교드림




    한은교입니다.
    나는 당신처럼 소설을 쓰고 있어요. 천재적이지 않으면 소설을 쓰는 것이 낫다는 선생님의 말씀 때문만은 아니어요. 당신이 뛰어넘지 못한 어떤 벽을 주제넘게 다시 도전해보려는 것도 아니구요. 나는 그냥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많은 걸 알지만 그 사람들과 같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능력이 된다면 선생님처럼 시도 써보고 싶구요.

    내가 처음 선생님의 노트와 당신의 일기를 보았을 때, 그땐 당신은 보이지 않았어요. 선생님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 쓸쓸히 떠나보냈다는 자책감에 당신을 잃었다는 슬픔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당신의 아픔과 소설가로서의 고뇌같은 것들은 비로소 늙어진 선생님의 슬픔에 비하면 오히려 더 건강한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얼마 전부터 소설을 쓰고 싶어 이야기가 너무도 그리운 내게 당신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나를 찾아왔어요. 당신을 만난 적도 없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아예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이라는 사람이 낯설기도 했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낯설음은 마치 모르고 있던 당신을 다시 만난 것처럼 어색하도록 반갑기도 했어요. 그랬어요. 어쩌면 나는 다시 찾아온 당신에게서 보다 더 분명한 나의 모습을 보았는지 모르겠어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가야하는 운명, 아예 가지 않는 절망보다는 가고서라도 못 이룰 절망. 우린 이미 선택 한 길을 벗어날 만큼 용기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요.

    밑으로 동생들만 있었던 내게 당신은 가끔 시시콜콜한 친구험담이라도 나눌 수 있는 맘편한 오빠이길 진정으로 바랬어요. 당신과 몸을 나눈 것에 시를 쓴다거나 소설을 쓰는 것처럼 의미를 두지는 않았지만...고백할께요, 나쁘진 않았어요. 싫지 않았구요. 나의 잘못은 거기 있었어요. 나는 선생님이 나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것은 싫었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것에 특별히 거부할만한 어떤 이유도 갖고 있지 않았거든요. 아마도 당신은 나를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나 역시 당신에게 준다고 해서 나의 순결성이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지는 않았어요. 아시나요? 그렇게라도 내가 줄 수 있는 것으로 그 순간만큼은 당신의 편이 되고 싶었어요. 그것은 진심이었요. 미안해요...우리는 서로가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나눌 수 있었고 서로를 더 알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조차 주고 받을 수 없었어요. 당신의 일기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된 당신이 당신을 만나서 몸을 나누면서 알게 된 당신보다 더 많고 더 큰 당신이라 말하면 서운할텐가요?

    당신은 나에게 처음부터 사심이 있었던 건 아니어요. 하지만 나는 알아요. 선생님은 내가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당신은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듯이 당신 역시, 당신이 사랑한건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었다는 것. 그랬어요, 당신은 선생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선생님의 곁에 당신이 아닌 그 누구도 다가가는 건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나를 원했고 내가 당신과 있음으로써 비로소 선생님과 나를 동시에 가진다고 당신은 그렇게 애를 썼던 거여요.

    아아..당신은 선생님의 성품과 습관, 행동반경을 누구보다도 그토록 잘 아는 사람이었으면서 왜 그의 욕망의 뇌관에 불을 붙이므로써 당신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선생님마저 태우려 했나요? 어쩌면 그 뒤에 서있는 당신까지도요? 당신은 결코 멍청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당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상대를 파멸시켰으니까요. 당신은 수없이 당신을 모욕주고 멍청이라 말하는 선생님에게 직접 대놓고 반항할 수 는 없었지만 그가 준 칼로 그를 위협할 줄 아는 비겁함은 숨겨둔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이 TV인터뷰로 선생님을 모욕 준 프로그램이 방영된 날 집으로 돌아와 방에 돌아누운 선생님을 두고 주방 한가운데 쭈그려 앉아 서럽게 흘린 눈물을 기억해요. 당신이 사랑하는 이가 상처 받는 것을 지켜볼 때 당신 가슴은 온전할 수 없었을 거여요. 선생님의 가슴을 찌르는 건 곧 당신의 가슴을 찌르는 것과 같았을 테니까요. 그래요 당신은 선생님을 그 누구보다도 저보다도 더 사랑했어요.

    나는 당신이 당신이 가진 재능만이라도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저 당신들과 거닐었던 뒷산, 주말마다 함께했던 오붓한 식사, 그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지금 내게 얼마나 소중한 추억인지 당신이 있었기에 그것은 가능한 것이었다고 천만번 더 말해봐도 당신은 기뻐하지 않는군요. 이제와 내가 당신과 선생님 사이에서 적절한 가교가 되어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들은 나를 그런 역할로 기대하지 않았고 나조차도 그건 필요치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멍청하다는 비난에는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당신 스스로가 택한 멍청함에서는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미칠듯이 안타까워요. 바보처럼 오랜세월 선생님을 순수하게 사랑한 당신이 한순간 나 때문에 모든걸 잃었다는 죄책감으로부터 결코 나는 자유롭지 못할 거여요.

    하지만 나는
    아니 나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누구보다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요?
    당신의 아름다움을 당신의 슬픔을 당신의 순수함을 당신의 고집을 당신의 노력을 그립도록 그리워 할거여요.

    여름이 오기 전에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가고 싶어요.
    잠시 만나 지금 구상하고 있는 소설에 대해 밤이 저물도록 이야기 해요.
    아무도 우리를 멍청하다고 하지 않을 거여요.


    당신을 다시 만난 이른 여름
    당신의 영원한 글벗
    은교 드림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낮이면 산 그림자 같은 심연의 골방에 밤이면 검버섯 가득한 거울앞에 그대로인가요?
    당신도 그랬겠지만, 나도 한때는 당신이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거나 우주같은 순결성을 간직한 적이 있었던듯해요. 이제와 지나보니 내가 나이었던 열일곱 소녀에게 사랑을 배우네요.
    심장보다 붉던 '목숨'을, 별보다 빛나던 '투명'을, 정맥보다 푸르던 '고귀'를 보았네요.
    내가 사랑한 지금의 당신도 결국 옛날의 나를 사랑한 것이었어요.
    나의 열일곱과 당신의 열일곱,
    세상의 달력으론 절교했지만 오늘 그리움의 달력으로 마주했네요.
    사랑했으므로 행복했고 아름다웠네요.
    고마워요, 당신


    <소녀여 시인이란 왜 그대들이 고독한지
    그것을 말할 수 있기 위해
    그대들한테 배우는 사람들이오>

    첫만남
    릴케를 위한 연가 中 - 문정희
  •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그것이 무엇?
    책방꽃방 | 2012년 0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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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면서 사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웠었다. 한없이 순수할거 같은 은교가 팔랑 거리며 시인의 눈앞에 나비처럼 날아다니는것을 보면서 정말 순수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사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웠었다.


    한없이 순수할거 같은 은교가 팔랑 거리며 시인의 눈앞에 나비처럼 날아다니는것을 보면서


    정말 순수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보기도 하고


    그런 어린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인을 보면서


    인간의 욕망이란 도대체 그 끝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스승의 글로 성공을 거두고 살면서 스승이 좋아하는 은교를 탐닉하려 하는 제자를 보면서


    이건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고리지어지는 삼각관계인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그 당황스러운 마음은 책을 들여다 보게 만드는 충분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오로지 시하나만으로 그 이름을 드높인 예순아홉의 시인 이적요에게 늦되어 찾아온 사랑이란 감정은


    지난날 사랑에 대해 진지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자신의 욕망쯤은 다스릴 수 있다 생각한


    당뇨와 온갖 합병증으로 이제 곧 죽을 처지에 놓인 그에게 내려진 형벌같은 것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이란것이 나이를 먹는다 해서 그에 비례해 사그라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뒤늦게 사랑에 눈 뜬 그는 이제 막 첫사랑의 감정에 눈뜨는 사춘기 소년 같은 감성을 보여주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는 내일이면 관속에 뉘여질지도 모를 너무도 비루한 모습이어서


    그런 감성만으로는 세상으로부터의 따가운 눈총을 면할길은 없다.



    소설은 영화와는 달리 첫부분에서부터 자신이 제자를 죽였음을 고백하는것으로 시작된다.


    시인 이적요의 고백같은 이야기와 그의 제자 서지우의 갈등과 번뇌가 담긴 일기가 번갈아


    그들이 각자 느끼고 있는 것들을 풀어내며 그들의 갈등이 고조되는 감정변화를 어필하고 있다.


    또한 다른 책들과는 달리 행간의 여백을 많이 두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혹은 시인 이적요의 고백이 어떤것인지


    독자들이 오해 없이 받아들여주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일까?



    아무튼 처음 은교를 만나는 장면은 영화에서 그려내는 장면과 흡사하다.


    이적요의 흔들의자에 놓여진 은교는 그야말로 금새 어디론가 날아가버릴듯 가녀린 모습의 처녀다.


    그 순간 이적요는 은교의 모습에서 순수 그자체의 처녀를 보았기에 욕망이 눈을 뜬건지


    그에게 숨겨져 있던 욕망이 불현듯 은교를 일순간 사랑하게 만든것인지 알길은 없지만


    어쨌든 이 장면은 이 소설이나 영화나 적요에게는 아주 강렬하게 각인 되어 지는 장면이다.


    그냥 그 장면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만을 가슴에 담고 끝났더라면 이야기의 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 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 p202~203


    은교가 그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그의 곁에서 한마리 나비처럼 나풀나풀 날아다니니


    한순간에 그의 욕망은 불같이 일어나 이미 오래전에 스러진 그의 욕정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제자와의 불온한 장면을 목격하면서 불붙여진 질투로 인해 점 점 눈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반면 은교가 올시간이 되면 괜히 설레고 일이 없는 날엔 부러 그애의 학교 앞을 찾아가 우연을 가장하고


    약속을 한 날에는 하루종일 온 신경이 은교를 만날일에만 쏠려 그는 점 점 젊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서지우, 그는 한번 결혼에 실패하고 좌절해 시인 이적요를 찾아와 그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한다.


    어찌 어찌 이 적요는 그의 처지가 안쓰러워 그를 끌어안게 되고 그의 궂은일을 제자가 도맡아 한다.


    그렇게 이적요와 서지우 두 사람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제자와 스승 그 이상의 관계였음에도


    은교로 인해 그들의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고 질투하는 모습이라니


    이제 열일곱의 은교가 무엇이라고 그들의 오랜 사제지간의 정이 그렇게나 무참히 부서지는 것일까?



    사실 서지우에게는 스승과 제자로 묶여진 관계이외에도 세상에 알릴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그런데 그 비밀이라는 것이 그들을 결속의 끈으로 묶어주는 류의 것이 아니라


    은교의 등장 이전에 이미 서로를 의심하고 질시하는 그런 관계에 놓이게 만든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틈새를 아무렇지 않게 날개를 팔랑이며 날아든 한마리 나비처럼 그렇게 은교가 날아와


    그 날개짓 한번으로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은 은교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자신을 죽일듯이 느껴지는 스승에 대한 불안으로 서지우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은교에 대한 스승의 절대 있을 수 없는 욕망의 눈길을 용납치 못해 스승을 모독하는가 하면


    자신 또한 스승과의 불안한 관계와 상처입은 지난날을 은교에게서 치유받으려 한다.


    처음 서지우는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스승이 타락해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 그런것이라 생각하지만


    점 점 그 자신 또한 은교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것이 질투에 의한 것이란 사실에서 갈등을 한다.



    적요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처녀 은교를 자신의 제자가 불순한 감정으로 추행하려 든다는 생각과


    자신을 산송장으로 만들어 모욕을 준 장본인이 서지우라는 사실을 안 순간 분노에 치를 떨고


    그리고 은교와 서지우와의 절대 있을 수 없는 행위를 목격하고 부인하면서 그의 살의가 극에 달해


    자신의 늙은 당나귀 자동차를 이용해 서지우를 죽이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런 적요의 낌새를 알라차린 서지우지만 결국 그는 스승의 계획을 알고도 결국 죽음에 이른다.



    어찌보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어린 소녀와의 관계만큼 참 이해하기 어려운 스승과 제자가 되어버린


    이적요와 서지우의 죽음은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반전이며 그들에게 내려진 형벌같은 느낌이 든다.


    또한 자신의 죽음뒤 문학관이 세워진 그 시점에 고백과도 같은 일기를 공개하라는 그의 유언은


    어쩌면 자신이 마지막에 품었던 욕망과 살인에 대해 세상으로부터 단죄받고 용서받고 싶었던 것일까?


    그 둘을 다 읽고 그들의 본심을 알아차린 은교는 자신의 아무렇지 않은 날개짓이


    두사람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음을 이제 알았을까?



    시인 이적요가 드문 드문 시를 읊으며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이야기 할때는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고


    열일곱의 처녀를 대표하듯 불쑥 자신의 삶속으로 날아든 은교에게 쓴 편지를 보며 안타까웠다.


    비록 늙는다는 것이 생이 그에게 준 벌이 아닐지라도 너무 늦게 찾아든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에게 다시 없을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조차 지니지 못하게 한 형벌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 서지우의 삶을 온통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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