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07
12,000원 | 312쪽 | 215*152mm
종합평점 : 4 ( 1 명)
저자 리노어 스커네이지는 2008년에 당시 아홉 살이었던 아들을 혼자 뉴욕 지하철에 태워서 집까지 오게 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기자이자 칼럼니스트이다. 이 일로 ‘미국 최악의 엄마America's worst mom’(구글에서 검색하면 나온다)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저자는, 이 일을 계기로 자유방목 육아를 주장하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은 자유분방한 어조로 농담과 비꼼과 신랄함의 직격탄을 거침없이 날리며, 아이를 마냥 뽁뽁이 비닐로 감싸두려는 부모들을 통쾌하게 논박한다. 그리고 자유방목 육아란 결국 아이를 아이답게, 상식으로 키우는 것임을 힘차게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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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자들에게
서론: 어서 오세요-악!

I. 자유방목 14계명
계명1 : 걱정할 때를 알자 - 친구와 연쇄살인범을 구분하는 법
계명2 : 뉴스를 끄자 - 범죄 드라마도 그만 보고
계명3 : 전문가를 멀리하자 - 내가 뭐든 제대로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 전문가들!
계명4 : 유아 무릎보호대를 사지 말자 - 유아 안전 산업 전체에 맞서자
계명5 : 변호사처럼 생각하지 말자 - 어떤 위험은 무릅쓸 가치가 있다
계명6 : 나무라는 사람들을 무시하자 - 내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다
계명7 : 초콜릿을 먹자 - 할로윈을 아이들에게 돌려주자
계명8 : 옛날 아이들을 생각하자 - 열 살짜리 아이가 직업 전선에 나섰다
계명9 : 세계적인 시각을 갖자 -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자유방목을 어떻게 하는가
계명10 : 용감해지자 -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들지 마라, 그래 봐야 소용없다
계명11 : 여유를 갖자 - 부모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아이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계명12 : 실패하자! - 실패는 새로운 성공
계명13 : 쫓아내자 - 나가 놀든 뭐하든 맘대로 하라고 하라!
계명14 : 아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자 - 아이들은 아기 취급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진짜 아기들은 빼고)

II. 자유방목 생활 안내

정말로 위험한가? - 당신이 걱정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안내

동물-잡아먹힐 위험 / 금속 야구배트 / 분유-분유는 쥐약인가? / 비스페놀A-젖병, 유아용 컵 등 / 휴대전화-휴대전화를 많이 쓰면 뇌종양에 걸리나? / 질식-음식이나 작은 물건이 목에 걸리는 것 / 기침감기약 / 유모차 사고 / 눈을 먹는 것 / 세균과 위생 / 할로윈 사탕-죽음의 키스? / 인터넷의 성적性的 유혹 / 납 중독-중국산 납 페인트, 납 장난감 등 / 비닐봉지 질식 / 놀이터 / 수영장, 물, 변기 / 날달걀 / 학교 총격 사건 / 아이들 버릇 망치기 / 쉰 도시락 / 유아돌연사증후군(SIDS) / 햇볕 / 십대의 성性 / 숲에서 놀기 / 걸어서 학교 가기(버스정거장까지만이라도) / 동물원의 동물

사탕을 든 낯선 사람 - 우유팩에 미아 사진을 넣은 사람들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결론 : 이름이 없는 문제 - 그리고 그 해결책
참고문헌
도움이 되는 책, 블로그, 웹사이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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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답게 키우기
    소일 | 2010년 0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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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 자식은 이렇게 키우지 말아야지'라며 미래의 육아지침을 마음에 새기곤 했다. 당시 내가 당했던 통제를 자식 대에서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
    학창시절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 자식은 이렇게 키우지 말아야지'라며 미래의 육아지침을 마음에 새기곤 했다. 당시 내가 당했던 통제를 자식 대에서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생활을 하고 좀더 넓은 의미의 육아와 교육의 기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기존에 어설픈(?) 육아·교육에 대한 입장이 훨씬 업그레이드 되었다. 우선 내가 생각하던 육아방식이 ‘통제’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깨달음을 전파하기 위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주변에 이야기하면 아직 애가 없어서 그래 키워보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그런 비아냥에도 자신 있었다. 이미 중심이 서 있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막 떠올린 아이디어가 아니라 세월을 거쳐 형성된 철학이라는 믿음이었다.

    어떻게 키워야 잘 키우는 것인가

    아이가 나오고 나서 행동에 돌입했다.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작고 어설프게 생긴 아기를 보면 어쩐지 부모인 내가 전적으로 도와줘야 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솟는 것이었다. 위험에 대한 불안감도 늘어서 그런 것도 있다. 아이에겐 아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도 있음이 또 하나의 요인이다. 서로 애를 학대한다고 사사건건 충돌하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가 감기 때 병원 가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 병원에 간적이 없었다. 물 많이 마시면서 쉬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으면 하루 만에 거의 나았고 심하면 ‘종합감기약’을 먹었다. 약이 듣는 것은 아니었다. 감기에는 약이 없으니까. 내 아들도 그러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딱 두 번 병원에 데리고 가봤다. 40도 가까이 이틀간 열이 지속되었을 때, 얼굴 전체에 두드러기가 솟았을 때. 결국 내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증명이 되고 말았다. 항생제를 거부하는 부모에게 타이레놀 처방이 전부였던 소아과 의사와 두드러기의 원인은 모르겠고 ‘접촉성피부염’이라는 광범위한 처방을 내리는 피부과 의사는 내가 원한 전문가가 아니었다.(나는 의사를 별로 믿지 않는다. 그들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 앞으로는 병원 데리고 갈일이 더 없어질 것이다. 요즘은 처도 내 쪽으로 점점 돌아서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좋은 공부다. 엊그제 대학친구의 식구들이 놀러와서 이틀간 묵었다. 동네 개울에 물놀이를 갔는데 나는 물가에서 5미터쯤 떨어져서 자리를 깔고 그늘아래 누워있었다. 눈을 감고 솔솔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곧 잠이 들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첨벙첨벙 하는 소리. 가끔 큰 돌을 던져서 큰 물장구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제지할 생각은 없었다. 첨벙첨벙. 연이어서 들리는 물장구, 좀 불규칙하게 들린다. 이거 허우적거리는 소리다! 눈을 떠서 바라보았다. 아이가, 없다. 맨발로 뛰어서 물로 들어갔다. 기껏 무릎정도 되는 물깊이다. 아이는 빠져서 곧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엎어져서 허우적대는 아이를 건져내어 물가로 나왔다. 화장실에 간다고 애보라고 신신당부하던 엄마가 뛰어왔다. 아이의 충격보다 처의 나무라는 소리가 더 두려웠다.

    그건 결국, 꿈이었다.

    친구네 아이와 엄마는 우리아이와 함께 같이 있었다. 시종일간 아이 곁에 바싹 붙어서 돌 던지고 노는 아이를 감시했다. 하지마라, 너무 큰 돌을 잡지 마라, 미끄러질라 조심해라, 엄마 손잡고 걸어라 아이가 스스로 선택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널 때부터 그랬다. 아예 안아서 건너갔다(위험하다). 나는 네 살 아들에게 혼자 건너기를 권했다. 아이는 무섭다고 했다. 물을 건너서 손짓을 했지만 징징거리며 아빠가 오기를 바랐다. 물속에 다리를 담그고 건너가서 아이의 손을 잡아서 건너게 했다. 가끔 돌이 흔들리는 것이 있어서 자세는 불안했다. 손을 놓고 스스로 건너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뒤에서 감시하는(?) 애엄마 때문에 포기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동생과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일 뿐 아니라 계곡의 큰 바위 위를 올라가는 것도 제지당한 적이 없다. 산 사이에 걸쳐진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나 밧줄로 묶인 위험해 보이는 외다리, 절벽을 오르는 철제계단을 오를 때도 스스로 했고 조심해라를 수십 번씩 외치는 지금의 부모들과는 달랐다. 너무 흥분한 순간에 적절하게 주의할 것을 주지시키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끔(사실 어린시절에 무릎은 성할 날이 없었다) 무릎이 까지거나 손바닥이 까져도 놀다가 그런 것이라 다음번엔 좀더 주의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정도였다. 담을 넘다가 입가가 찢어져서 열두 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받은 때에도 나의 ‘부잡스러움’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해서 놀지 않게 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좀 더 주의력이 생기고 위험함을 인지하게 된 정도랄까.

    아이는 스스로 큰다
    지금 아이들은 너무 과보호 속에 자라고 있다. 주체적 놀이라는 것을 경험할 틈도 없다. 시골 초등학교 6학년들에게 발피구(둥그런 원에서 공을 차다가 놓친 사람이 원안에 들어가서 공을 맞거나 잡는 게임)를 가르쳐주고 ‘사부님’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을 정도다. 내가 그 나이 때는 짬뽕, 오징어, 구슬놀이, 팽이, 비석치기, 딱지치기 등을 하고 놀았다. 요즘 아이들은 기껏 공을 차거나 공을 던지거나 하는 프로스포츠 흉내 내기밖에 할 줄 모른다.

    네 살 아들이 돌을 잡을 때마다 “이거” 하면서 검사를 받는다. 그럼 아이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돌의 크기가 충분히 작다는 것을 인정해준다. 그런 돌을 던지면서 논다. 세상에 물에 돌을 던지면서 자신이 들 수 있고 없고를 엄마가 결정해준단 말인가.

    모두 두려움 때문이다. 아이가 빠지는 꿈을 꾸는 것처럼 혹시 우리 아이가 하는 불안감이 행동을 제약한다. 아이의 행동뿐만 아니라 부모의 행동도 제약된다. 미국에서는 아이가 두블럭 (몇 백 미터 정도 되지 않을까) 떨어진 곳에 심부를 다녀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차로 데려다 주거나 부모가 동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지하철을 타고 등교하는 것은 ‘아동학대’에 속한다. <뉴욕범죄수사대><크리미널마인드>등은 갖가지 기상천외한 범죄만을 생산해내고 있지 않은가. 실재하지 않는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자유방목아이들>의 저자 리노어 스커네이지는 지극히 평범한 부모이다. 아이를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키우기 위해 ‘자유’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지금 아이들은 행동 결정권이 전혀 없다. 핸드폰으로 우유를 먹어도 될지 옥수수 빵을 먹을지 컵케익을 먹을지를 결정해주는 부모의 명령을 기대할 정도다. 모두가 두려움 때문이다. 뉴스와 드라마는 범죄와 사고의 가능성을 크게 부각한다. 시청률을 위한 선택이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내게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반복적인 노출로 굳어지게 돕는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고’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것을 어른인 자신이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발전시킨다.

    통제는 불가능하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까.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나을지 골프채를 잡게 하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될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학과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학원에 보내서 나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정도는 어느 부모나 다 하는 것이다. 차라리 학원을 보내지 않고 도제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가능성’면에서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부모는 드물다. ‘주류’에서 벗어날 경우의 불이익이 두렵기 때문이다. 오로지 모두가 꿈꾸는 희망을, 소수가 잡게 될 그것을 바라고 있는 꼴이다.

    초등학생 아이들 몇 명이 와서 당신에게 뗏목을 만들어 여행을 가겠다고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위험해서 안돼”하겠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어떤 ‘쿨한’ 삼촌은 기꺼이 그러라고 하고 아이들이 만든 뗏목을 강가에 차로 실어다주기까지 했다. 조끼를 다 입히고 태워주고 물로 밀어주기까지 한다. 아이들은 뗏목을 타고 그것이 상상하던 모험과 다름을 느낀다. 강의 급류를 타고 흐르기라도 하면 두려움은 급속히 는다. 이때 그 삼촌은 미리 매어 놓은 줄을 당긴다. 강가에 도착한 아이들은 삼촌의 배려에 감사하고 진짜 모험의 설렘과 철저한 계획 없는 실행에 대한 두려움을 배운다.

    ‘만들어진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을 위해 자신이 자라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뉴스의 범죄를 내가 당할 확률은 로또에 당첨될 확률에 가깝다. 이런 확률의 사건에 대한 기대로 맘을 졸이고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잘 되지 않는다고? 티브이와 신문을 끊어라. 그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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